[뉴스토마토 이보라기자] "제발 잘 나간다고 하지 말아 주세요"
# 신시장을 개척한, 소위 잘 나가는 중소가전업체 P사 관계자의 말이다. 대기업과의 경쟁 속에서도 실적은 꾸준하다. 그럼에도 "잘 나간다"고 알리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 손사래를 치면서 "살려달라"고까지 말한다. 우리는 이대로 소리없이, 묻혀 있는 듯 존재감 없이 있는 게 좋다는 게 그의 속내다.
# A사와 B사는 악화된 실적을 시장 탓으로 돌리며 '시장이 침체돼 있다'고 항변한다. 반면 C사는 대기업 D사와의 경쟁에도 불구하고 자체 최고 판매량을 돌파하는 등 승승장구하고 있다. A사와 B사의 네거티브 마케팅이 시장에 악영향을 주는 것을 염려하면서도 C사는 "왜 시장을 왜곡하느냐"며 반격하지 못한다. 사실을 말한들 좋을 게 없다는 설명이다.
이들 모두 대기업의 견제를 무엇보다 두려워한다. 행여나 우리가 이만큼 팔아서 '잘 나간다'고 알려지면 대기업이 라인업을 확대하거나 물량공세를 펼치는 등 프로모션이 시작된다. 혹은 판매사원을 빼간다거나 대형마트에서 브랜드의 힘을 내세우는 등 '공평치 못한' 방식으로 영업을 방해한다. 공공연한 일이다.
중소 생활가전 분야가 중소기업 적합업종도 아니고 대기업이 진입하면 안 된다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공평하게 경쟁했으면 좋겠다는 게 관계자들의 희망이자 소망이다. 중소기업이 영역을 만들어 놓으면 대기업이 들어와서 시장의 파이를 키우는 것은 전 세계 보편적인 일이다. 하지만 기술과 인력에 대해 가치를 매기는 공평한 방식이 아닌 자본과 브랜드를 내세워 시장을 잠식하는 방식은 분명 잘못됐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이렇게 싸움이 진행되면 어느 곳 하나 살아남을 중소기업이 없다.
대기업이 중소기업이 애써 키워놓은 영역에 뒤늦게 발을 들여놓는 것 자체도 문제라는 지적이다. 눈치를 보다가 시장의 가능성이 확인되면 자본력을 앞세워 침탈하듯 진입해 결국은 점령군 행세를 한다는 설명이다. 이는 또 대기업 일부 부서 임원의 자의적 선택일 가능성이 높다. 한 부서나 파트의 목표 달성과 대외 과시용 결정일 뿐 그룹의 미래가 달린 전략적 투자결정이 아니다. 그룹의 생존을 고민하는 수뇌부의 결정과는 거리가 멀다는 얘기다. 하지만 중소기업에게는 생존 자체의 명운이 달린 일로 비화된다.
중소기업은 참신한 아이디어와 기술을 바탕으로 제품을 개발해 시장에 내놓고 선택과 평가를 기다린다. 이것을 발판으로 제품을 업그레이드하고 다각화하면서 덩치를 키워나간다. 중견으로 커나가야 한다. 정부가 그토록 강조하는 성장 사다리다. 하지만 지금과 같이 '손 안 대고 코푸는 식'의 대기업 침탈이 계속되면 중소가전 업계는 고사하고 말 것이다. 사전 규제든 사후 규제를 동원해서라도 중소기업끼리, 혹은 중소기업이 대기업과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이 절실하다.
"그냥 우리만 열심히 하면 됩니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걸요"
자조섞인 목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장차 국가경제의 중추가 될 역량 있고 활동적인 중소 기업이 대기업에 대한 피해의식과 패배감에 적지 않게 고통받고 있다. 언제쯤 '잘 나간다고 자랑하는' 중소기업을 만나볼 수 있을까. 한동안은 요원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