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운전 기사를 기다리다가 술에 취한 사람의 행패를 피해 차량을 50미터 운전한 경우도 음주운전이라는 판결이 나왔다.
A(41·여)씨는 지난 9월1일 밤 0시30분경 술을 마셔 운전을 할 수 없게 되자 서울 중구의 한 빌딩 앞에 차를 대놓고 대리운전 기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술에 취한 B씨가 나타나 "왜 여기에 주차를 하느냐, 내 말 무시하냐, 가만두지 않겠다. 감방에 처넣고 죽여버리겠다"며 A씨를 협박했다.
당황한 A씨는 B씨를 피해 50미터 정도 떨어진 한 호텔 앞길까지 승용차를 몰고 갔다. 하지만 B씨는 그곳까지 따라와 차량을 가로막고 주차위반으로 단속하라면서 경찰에 신고했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은 당시 심야시간이고 차량이나 보행자의 통행에 지장이 없어 단속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에 B씨는 "민주 경찰이 이래도 되냐, 네가 경찰이면 다냐"라며 큰 소리로 경찰관에게 욕을 했다.
검찰은 B씨를 협박, 모욕 혐의로 약식기소했고 B씨는 벌금 200만원을 선고받았다. 검찰은 A씨도 음주운전 혐의로 약식기소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6단독 김주완 판사는 도로교통법상 음주운전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벌금 200만원의 선고를 유예했다고 27일 밝혔다. 선고유예는 2년이 지나면 형이 면제된다.
재판 과정에서 A씨의 변호인은 "취객의 협박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의 통행이 좀 더 많고 밝은 쪽인 호텔 부근으로 40~50미터를 운전했을 뿐"이라면서 "이는 긴급피난이나 정당행위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A씨는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차량을 운전하지 않고도 그 정도 거리를 이동해 피신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A씨가 술에 취해 차량을 운전한 것은 정당행위나 긴급피난의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다만, "범행 경위에 고려할 만한 사정이 있는 점 등을 참작했다"며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신지하 기자 sinnim1@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