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갈망하던 민주주의가 후퇴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상황에서 그 분이 더욱 그립고 아쉽습니다."
김선수(55·사법연수원 17기) 변호사는 조영래 변호사를 이렇게 추억했다. 1988년 2월 사법연수원을 갓 졸업해 조 변호사가 운영하던 남대문합동법률사무소에서 새내기 변호사를 시작한 그다. 이후 1990년 12월12일 44세라는 젊은 나이의 조 변호사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옆에서 그를 지켰다. 25년이 지난 지금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회장을 역임하고 노동법 연구와 노동인권의 선봉에 선 그지만 아직도 조 변호사를 떠올릴 때면 그날의 새내기 변호사로 돌아가는 듯 했다.
"변호사 활동의 롤 모델이라고 할까요. 곁에서 배울 수 있었던 것을 저로서는 큰 행운으로 생각합니다. 다른 변호사들에게도 귀감이자 사표를 보인 분이시죠."
조 변호사는 법조인으로서도 귀감이 되지만 민주화 운동 등 사회적으로도 큰 획을 그은 사회지도자였다. 산화한 전태일 열사가 그의 글로 다시 살아나 우리나라 노동운동이 일대 전기를 맞았다. 그런가 하면 그는 일상적인 사건에서도 사회적인 의미를 찾아내 법적 판단을 뒷받침하면서 여성이나 저소득층 등 사회적 약자 보호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상수 변호사,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1세대 노동인권 변호사로서 불꽃처럼 살다간 그를 김 변호사를 통해 만나봤다.
김선수 변호사. 사진/최기철 기자
25주기 기념사업은 어떻게 기획됐나.
20주년 추모행사 후에 별 행사를 못해서 25주기 때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있는데 마침 서울지방변호사회 김한규 회장이 연락을 해왔다. 조영래 변호사 25주기에 맞춰서 기념사업을 대대적으로 해보고 싶다고 했다. 우리 입장에서는 매우 고마운 일이었다.
김 회장이 제안을 해왔을 때 내용이 어느 정도 결정이 되어 있었다. 흉상제작과 기념 전시회, 자료집 제작, '조영래상' 수여 등이다. 김 회장이 기념사업위원회를 구성하는 게 좋겠다면서 위원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기본적인 취지에 공감을 하고 가족과 중간에 매개역할을 하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맡았는데 너무 과분한 직을 맡아서 조 변호사님께 누를 끼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된다.
20주년 때도 기념사업 있었다.
그때는 공식적으로 조영래 변호사 추모모임이 있었다. 조 변호사님이 돌아가시고 홍성우(77·고등고시 13회) 변호사를 위원장으로 해서 10주년 행사도 했다. 과거에 있던 추모모임은 현재는 공식적으로 모임을 갖고 있지는 않는 것 같다. 그 모임에서는 내가 막내다. 홍 변호사님, 그리고 조 변호사님과 남대문합동법률사무소에서 함께 일했던 윤종현(62·사법연수원 14기) 변호사님, 남대문합동법률사무소 부설 시민공익법률상담소 박석운 상담 소장님 등을 중심으로 모임을 갖고 있다. 2010년 20주기 때 추모모임에서 세미나를 열고 총 6분이 주제 발표를 했다. 권인숙(부천 성고문사건 피해자)씨, 장기표(71) 전태일재단 이사장, 한인섭(57)서울대 교수 등이 발표를 했다. 저도(당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회장) ‘조영래를 기억한다’는 주제로 발표했다.
장 전 이사장은 조 변호사님과 대학 동창인데, 고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과 세분이 이른바 서울대 3인방이다. 조 변호사님과, 손학규(69)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김 상임고문 이렇게 3명은 경기고 3인방이다. 장 전 이사장은 다른 학교에 있다가 서울대로 와서 같이 조영래 변호사와 같이 학생운동을 했다. 나이는 두 살 위다.
추모 자료들은 어떻게 마련했나.
서울변호사회 직원분들로 꾸려진 전담 TF가 있다. 그분들이 자기 일처럼 열심히 해줬다. 박상진 사무국장은 훌륭한 시도 써줬다. 자료는 시기별로 정리가 됐는데 직원분들이 해설을 다 정리해줬다. 자료는 조 변호사님 유족들이 보내주신 게 있고 한인섭 서울대 교수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것을 지원해줬다. 언론 보도자료는 서울변호사회에서 신문사 측에 협조를 구했다. 서울대 도서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도 지원을 받았다. 여러분들이 힘을 모았다.
서울지방변호사회관 1층에 마련된 조영래 변호사 25주기 기념전시전. 사진/최기철 기자
25주기를 맞는 소회가 어떤가.
조영래 변호사님은 당신이 활동했던 시기에서 민주화를 못 보시고 돌아가셨다. 이후 민주화가 진전됐을 때 그 세상을 못 보시고 가신 것이 가슴이 아팠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상황이 다시 어려워지고 있다.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고 심지어는 유신으로 회귀하는 것 아니냐 하는 이런 상황이다 보니까 조 변호사님이, 그리고 그 당시 조 변호사님의 활동 등이 다시 마음에 다가오고. 그런 점에서 아쉬움이 더욱 크다.
이번 기념사업의 취지는 무엇인가.
서울변호사회는 정의수호와 인권옹호, 민주화실현을 위해 헌신한 조 변호사님의 공로를 조명하고 ‘올바른 법조인상’을 재정립하며 현재의 변호사들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기념사업을 기획·추진해왔다. 나도 이에 적극 공감한다. 조 변호사님은 법조인 특히, 변호사의 귀감이자 사표를 보이신 분이다. 변호사 2만명 시대에 변호사의 본분 등이 제대로 자리매김 할 때 롤모델로서 삼을만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조영래 변호사와는 어떻게 처음 인연을 맺었나.
대학 다닐 때는 안 잡히고 잘 도망 다니는 선배가 있다는 정도로만 알았다. 그러다가 연수원 마칠 때 변호사 활동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이었다. 저는 사법시험을 준비한 목적이 노동 분야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는 것이었다. 마침 조 변호사님이 운영하시던 남대문합동법률사무소에 부설 시민공익법률상담소가 있고 박석운 소장이 그 곳에서 노동자들에 대한 지원 상담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래서 1988년 2월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다음 동기였던 박주현(53·사법연수원 17기) 변호사와 무작정 찾아가서 ‘우리가 여기서 활동하려고 하는데 사정이 어떠냐’고 했다. 박 소장이 흔쾌히 좋다고 해서 곧바로 조 변호사님과 면접 비슷하게 만난 뒤 바로 근무하게 됐다. 그 때 처음 만났다.
조 변호사는 처음부터 단독으로 개업했나.
아니다. 1982년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뒤 1년6개월간 김앤장법률사무소에 있다가 1983년 7월쯤 서울 서소문에 명지빌딩 13층에 개업했다. 김앤장에서 천정배(62·사법연수원 8기) 변호사와 같이 있었다. 윤종현 변호사가 1985년에 합류했고 1986년쯤 천정배 변호사가 같이 일하게 됐다. 저와 박주현 변호사가 1988년 사무소에 들어가면서 천정배 변호사는 다시 김앤장으로 복귀했다. 이후에 조 변호사님, 저, 박주현, 윤종현 변호사 이렇게 4명이 같이 근무하다가 1989년 김한주(66·사법연수원 15기) 변호사가 군법무관을 마치고 합류했다. 그렇게 5명이 조 변호사님 돌아가실 때 까지 같이 활동했다.
조 변호사님은 사법시험 13회 합격으로, 원래대로라면 사법연수원 3기이지만 12기로 수료했다. 1971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직후 서울대 내란음모 사건과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감과 수배생활을 하면서 연수원 입소가 늦어졌다. 박원순 서울시장 등이 사법연수원 동기다.
조영래 변호사가 생전 자신이 운영하던 서울 서소문 명지빌딩 13층 남대문합동법률사무소 사무실 소파에 앉아 미소를 짓고 있다. 사진/최기철 기자(조영래 변호사 25주기 기념전시전)
조영래 변호사의 첫인상과 성격은 어땠나.
수수했다. 예리하기보다는 훈훈하고 털털한 복장과 외모였다. 박석운 소장이 매개가 되니까 당연히 같이 일하는 것을 전제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던 기억이 난다. 당시 조 변호사님은 노동뿐만 아니라 인권변호사의 상징으로 많이 알려져 있었다. '권인숙 사건', '망원동 수재사건'을 맡아서 1심에서 막 승소판결을 받을 때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개척자였다.
그 분은 자기를 내세우고 그런 스타일은 아니었다. 차분하게 설득하는 스타일이었다. 외모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넥타이를 항상 꼭 매지 않고 느슨하게 하고 와이셔츠 맨 윗 단추도 풀고 다녔다. 유머도 있었다. 풀 때는 확실하게 풀고, 일 할 때는 완전히 집중해서 혼신의 힘을 다 했다. 체질적으로 술이 안 맞아서 약주는 잘 안 하셨다. 그렇지만 자리를 끝까지 챙기셨다. 약속 시간을 잘 안 지키기로도 유명했는데 늘 사람들을 대하다 보니까 당신 약속 있다고 상대방 말을 끊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만큼 정도 많은 분이었다.
조 변호사와의 일화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조 변호사님은 누구를 혼내거나 그런 적은 없었다. 하다못해 여직원한테도 큰소리 한 번 낸 적 없다. 모두를 세심하게 배려했다. 그런 분이었다. 1988년 우리 두 명이 들어가니까 사무실 차원에서 5월에 처음으로 1박2일로 야유회를 갔다. 오대산 월정사-속초-한계령 넘어서 돌아왔는데. 그때 조 변호사님은 둘째 아들을 데려갔고. 저도 아내를 데려갔다. 일행이 한계령 계곡 바위에 앉아 놀고 있는데 거기서 갑자기 노래를 부르셨다. 조 변호사님이 노래를 좋아하셨다. 또 잘 부르셨다. '백치아다다나' 가곡 '기다리는 마음', '망향' 등을 즐겨 부르셨다. 저는 노래를 잘 못해서 시키면 지금도 참 싫어하는데 근데 거기서 시키셔서 할 수 없이 한번 불렀다. 석탄가를 불렀는데, 음정박자 전혀 못 맞추고. 조 변호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노래는 저렇게 독창적으로 해야 한다"고 하시더라.
조 변호사는 천재라고 불릴 만큼 다방면에 뛰어났던 것 같다.
일단은 외국어 실력이 출중했다. 특히 한자 공부 기본이 아주 탄탄했다. 중학교 때 불경을 직접 읽었다고 한다. 한 일화가 손학규 전 고문의 말을 들어보면 조 변호사님이 어느 절에 같이 가 있을 때인데, 스님이 법당에서 어디로 나간 상태에서 신자가 와서 불공을 드려달라고 하니 조 변호사님이 독경을 했다고 한다. 그 정도다.
영어도 잘했는데 한인섭 교수에 말에 따르면 사법시험 1차용 영어문제집을 직접 썼다고 한다. 변호사 할 때도 외국에 보낼 서면을 직접 작성하기도 했다. 어학에 탁월했다.
동생인 조순경 이화여대 교수 말씀에 따르면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했다고 한다. 또 한시를 직접 써서 선물하기도 하고. 확실히 범접하기 힘든 천재성이 있었던 것 같다.
또 집중력이 대단했던 것 같다. 조 교수 말에 따르면 한번 무엇인가에 몰두하면 뜨거운 방에 앉아서 엉덩이에 바지가 달라붙을 정도가 되어도 모르고 집중했다고 한다. 고 3때 한일정상회담 반대 시위를 주도했다가 정학을 당했는데도 몇 개월 입시 공부해서 월등한 성적으로 서울대 전체 수석으로 입학했다. 사법시험을 준비할 때도 1970년 11월 전태일 열사가 분신하자 공부하다가 뛰어나와서 학생장을 준비하는 등 활동했는데도 바로 다음해인 1971년에 합격했다.
변호사로서 사건을 맡았을 때도 완전히 집중했다. 지금 기억나는 것은 국제그룹 양정모 회장 사건이다. 그 사건 수임했을 때 일주일 정도 기록을 다 싸들고 호텔로 가서 서면을 썼다. 그게 헌법재판소에서 최종 위헌결정을 받는 단초가 됐다.
문장은 아주 절차탁마해서 나오는 유려한 문장이었다. 일필휘지 스타일이 있고. 쓰고 난 뒤 계속 절차탁마하는 스타일이 있는데. 물론 일필휘지 해도 잘 쓰시겠지만. 계속 반복적으로 수정하시는 그런 스타일이었던 것 같다. 친필로 쓰신 것들, 특히 권인숙씨 사건 변론요지서를 보면 마지막 순간까지 수정을 했다. 신문 칼럼을 쓸 때도 칼럼이 유려하게 쉽게 읽히는데. 한 편 쓸 때마다 담배 세갑을 필 정도로 각고의 과정을 거쳤다. 몸을 갉아먹으면서 나오는 문장이었다.
다재다능한 천재인데, 하필 법학을 왜 선택했을까.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조영래 변호사, 그리고 65학번을 기점으로 서울대 학생운동의 중심이 인문대에서 법대로 옮겨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손학규 전 고문이나 장기표 전 고문도 그렇게 증언하고 있다.
조영래 변호사가 특히 노동분야에 애정을 많이 가졌던 이유는 무엇인가.
조 변호사님은 전태일 열사 분신 이후, 수배 중에 전태일 열사의 일기와 수기를 다 모아 평전을 써 그를 다시 살려냈다.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이런 것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애정과 신뢰에서 출발한다. 노동자들이 우리 시대 가장 고통 받는 계층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좋아하고 소중히 여기는 기본적인 품성에서 비롯되어서 시민공익법률상담소도 부설한 것이다. 계급주의적 관점 보다는 인간에 대한 신뢰에서 출발한 것 아닌가 싶다.
조영래 변호사(왼쪽)가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 피해자 권인숙씨와 함께 재판에 참석한 뒤 법원을 나오고 있는 모습을 보도한 당시 언론 사진. 사진/최기철기자(조영래 변호사 25주기 기념전시전)
조영래 변호사는 어떤 법조인이었나.
변호사로서는 사회의 개혁, 인권의 신장과 확대에 기여할 수 있는 사건을 찾아서 수행을 하고 그 과정에서 상당히 철저하게 준비를 했다. 이어서 다양한 전략전술을 전개하고 결국에는 승소판결을 받아내는 그런 훌륭한 변호사였다. 사회적인 의미를 갖는 사건을 적극적으로 찾아서 수임을 했다. 일상적인 사건에서도 사회적인 의미를 찾아내고 여론화를 거쳐 결국은 승소판결을 이끌어내 우리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변호사는 기본적으로 법관을 설득해야 한다. 조 변호사님은 그런 부분에서도 외국의 사례를 치밀하게 연구하는 등 준비를 많이 했다. 한번 파고들면 법관도 완벽하게 설득할 수 있는 논리와 문장력도 갖췄다.
대표적인 사건으로, 여성조기정년 사건이 있다. 그 사건은 일반 교통사고에 대한 손해배상청구사건이었다. 피해자는 여성전화교환원이었는데, 당시 일반직 정년은 55세, 피해 여성의 경우는 결혼퇴직정년제를 적용해 25세가 정년이었다. 일반 교통사고 손해배상청구사건에서 일실수입하면 25세까지만 회사원의 수입이 인정됐다. 25세 이후에는 정년을 넘었다고 해서 일용 여성노임으로 계산했다. 일반 변호사라면 당연히 넘어가는 사건이었지만 조 변호사님은 여성에 대한 심각한 정년차별 아니냐는 시각에서 접근했다. 당시 피해자는 1심에서 패소한 뒤 항소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조 변호사님이 사건을 맡아 항소했고 기일 전인 1985년 6월19일 의견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이 사건은 여성 정년 차별이라는 심각한 문제이고 여성노동에 대한 사회적 편견들이 기초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 부분을 깨뜨리는 것이 사회적인 과제다"라는 취지였다. 이후 조 변호사님은 여성단체들과 공동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세미나도 개최하면서 치밀하게 준비했다. 또 언론에 기고를 통해 문제를 제기하는 등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한 뒤 재판부를 설득해나가기 시작했다. 결국 그 사건은 2심에서 승소했고 판결이 확정됐다. 당시 여성 정년을 깬 최초의 무효판결이다.
유명한 망원동 수재 사건 등 환경문제는 그 당시 인권변호사들도 관심을 갖기 이전이다. 당시 시국사건이 너무 많았다. 그런데 그 때 조 변호사님은 이미 집단소송으로서의 수재사건, 환경사건에 관심을 가졌다. 석사논문도 환경분야를 쓰셨다. 늘 그런 새로운 분야들을 개척했다. 법조인으로서도 열린 자세가 있었다.
"늘 우리사회 방향성 제시…
조영래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하게 돼"
사회 지도자로서는 어떤 분이었나.
안영도(70·사법연수원 13기) 변호사님 얘기에 의하면 당시 조 변호사님 주위 사람들 중에 ‘조영래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나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아서 서로들 싸우기도 했다고 한다. 엄청난 재주다. 생활에서도 그동안 살아온 과정이나 하고 있는 활동이나 지위, 역할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도 조 변호사님을 전적으로 좋아하고 믿고, 신뢰하고, 아낌없이 도와줬다. 당시 판사들 중 괴팍하다고 소문난 사람도 조 변호사님을 상당히 높게 평가했다. 조 변호사님의 그런 능력은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애정이 밑받침이 되어 있다. 또 이념적으로 편협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88올림픽 부분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부분도 있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신적도 있다. 1990년 1~5월 미국연수 때 러시아도 함께 방문하고 돌아와서 사회주의는 이제 퇴조하는게 아니냐 하는 의견을 피력하셔서 젊은 변호사들이 의아해 했다고 한다. 이념면에서는 유연한 분이었다. 또 상당히 개방적인 자세를 갖고 계셨고 상대방을 배려하고 경청하는 태도가 몸에 배어 있었다. 일은 당신이 다 추진하면서도 절대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런 겸손한 태도가 배어 있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구체적인 도움을 줬다. 임도빈(법무법인 다온 고문)씨와의 일화가 있다. 두 사람은 서울대 법대 재학시절 학생운동을 같이했던 동창생이다. 임 고문이 대학 2학년이 되면서 등록금을 마련하기 어려워서 군대에 입대하겠다고 했다고 하니까 조 변호사님이 몇 일 후에 임 고문에게 학생증을 가져다 줬다고 한다. 당시에는 등록금을 내야만 학생증을 만들어줬다. 학생증에 적힌 '임도빈'이라는 이름은 조 변호사님의 필체로 적혀 있었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조 변호사님의 부탁으로 어느 교수님이 등록금을 대신 내줬다고 한다.
신순애씨와의 일화도 있다. 그분은 청계피복노조활등을 했던 분인데 조 변호사님이 전태일 평전 쓸 때 이소선(전태일 열사 모친) 어머님께 '여공시다'로서의 생활을 잘 얘기해줄 수 있는 사람을 소개시켜달라고 해서 소개받은 분이다. 열 세 살 때부터 청계천에서 '여공시다'를 했다. 당시 조 변호사님이 신씨를 만나보니 결핵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연세대병원에 근무하는 여성의사와 같이 검진을 받게 하고 치료받을 수 있게 도와준 일도 있었다.
학창시절에도 상당히 인정을 받았다. 깐깐하기로 유명했던 곽윤직 서울대 법대교수도 "(나 다음에)대한민국의 두 번 째 천재"라고 강의시간에 칭찬할 정도였다. 조 변호사님이 돌아가셨을 때 그분이 학창시절 강의했던 한 교수님은 "대통령이 될 친구가 너무 일찍 죽었다"고 매우 애통해 했다고 한다.
조영래 변호사가 민주화 운동을 하던 당시와 현재가 상당부분 닮아 있다는 시각도 있다.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참 취약한 것 같다. 10년간 진전되었던 것이 정권이 교체된 이후에 쉽게 후퇴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기반이 너무 취약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명박 정부 때도 그랬지만 현 정부에서 더욱 심각한 것으로 보인다. 너무 포용성 없는 사회로 가고 있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집회시위를 비롯한 표현의 자유는 물론이고 통합진보당 해산이나 국정교과서 강행 등을 보면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을 가진 세력은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태도 아닌가. 공안세력이 전면에 나서는 것이 그런 맥락인 것 같은데. 전체주의로 회귀하는 것 아닌가 하는 매우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조 변호사님은 이런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온 몸을 불살랐다고 할 수 있다. 그분 생전에는 안 됐지만 나중에 결실을 맺어서 정권교체를 이룬 기간도 있었는데 다시 되돌아가는 것 같아서 우리 세대는 뭐했는가 하는 자괴감도 든다. 많은 분들이 조 변호사님이 지금도 살아 있다면 현재 모습이 많이 다르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들을 하는 것 같다.
서울지방변호사회관 1층에 마련된 조영래 변호사 25주기 기념 전시전. 사진/최기철 기자
조영래 변호사의 삶이 현 시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은 무엇인가.
조 변호사는 통합의 리더십을 가진 분이라는 평가를 많이 받았다. 지금 그런 리더십이 여야 모두에게 필요한 때이다. 그분을 잘 아는 사람들은 "조영래가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하는 아쉬움들을 많이 느끼는 것 같다. 이런 평가 자체가 우리사회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민주주의가 진전 되고 사회적 통합이 제대로 실현됐다면 그 분이 덜 그리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 변호사님이 과제로 삼고 평생을 바쳤던 시대적인 과제가 여전히 남아있고 엄중하게 존재하니까 더욱더 그분의의 삶과 활동이 현재 우리사회서 모범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특히 변호사들로서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여전히 공익적인 역할이 강조되는데, 그런 부분에서도 조 변호사은 모범이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후배 변호사들이 그 분의 뜻을 깊이 새기고 우리 삶을 다시 재정립하는 차원에서 서울변호사회관에 마련될 조 변호사님의 흉상을 볼 때마다 자신의 삶을 다잡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조영래 변호사 25주기 기념행사 본행사
일시 : 2015년 12월11일(금) 오후 2시
장소 : 변호사회관 지하1층 대강당
흉상제막식 : 같은 날 오후 3시10분, 변호사회관 1층 현관 앞
최기철 기자 lawch@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