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재영기자] 삼성전자와 LG전자 세탁기가 또 다시 보호무역 덫에 걸렸다. 1차 세탁기 분쟁이 채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미국 당국이 폭탄 수준의 덤핑마진율을 매기면서 2차 분쟁이 촉발됐다. 특히 최근 미국에서는 한국산 제품에 대한 덤핑 제소가 줄을 잇는다. 대선 정국과 함께 보호무역 기조를 반영해 수입 규제 또한 한층 강화될 것이란 우려도 커지고 있다.
미국 상무부(DOC)는 20일(현지시간)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세탁기가 자국 시장에서 공정가격 이하로 판매했다며 덤핑 예비판정을 내렸다. 상무부는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중국공장에서 생산해 미국에 수출한 세탁기의 덤핑마진율이 각각 111.09%, 49.88%에 이른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양사는 덤핑마진율에 해당하는 현금 혹은 유가증권을 세관에 납부해야 한다. 상무부는 또한 삼성전자가 세탁기 재고를 축적해 판정 효과를 훼손하려 했다고 보고, 덤핑율을 90일 소급적용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은 2011년 말부터 자국 기업 제소에 의한 덤핑·상계관세 관련 조사의 경우 예비판정을 받은 업체에 대한 현금 위탁금 공탁 의무를 신설했다. 이번 판정은 해당 의무가 적용되는 사례로, 양사는 후속절차가 완료될 때까지 현금 공탁금을 지불해야 한다. 향후 절차는 상무부의 최종판정과 국제무역위원회(ITC)의 최종판정이 남아있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대응책을 마련 중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미 상무부 예비판정 결과에 유감”이라며 “당국에 적극 해명해 혐의 없음을 입증할 것”이라고 말했다. LG전자도 “이번 판정에 자사의 입장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아 미 상무부에 이의를 제기할 예정”이라면서 “ITC에는 미국 내 산업에 끼친 피해가 없다는 점을 강조할 계획이며 ITC가 이를 받아들이면 이번 사안은 모두 종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월풀은 지난해 12월 삼성과 LG, 양사가 중국에서 생산한 세탁기가 생산비보다 낮은 가격으로 미국에 판매되고 있다며 당국에 제소했다. 월풀은 이날 판정에 대해 “삼성과 LG의 심각한 덤핑을 중단시키고 공정무역을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결정”이라고 환영했다. 월풀은 2011년 12월에도 한국산 세탁기를 덤핑 제소해 2013년 ITC가 반덤핑 관세 부과를 최종확정한 바 있다. 한국 정부는 이 같은 조치가 부당하다며 WTO에 제소했고, 올해 1차 승소 판정을 받은 뒤 미 당국이 상소한 상태다.
한국산 세탁기의 대미 수출액은 지난해 약 5446만달러를 기록, 전년보다 6% 정도 상승했다. 올 들어서는 지난달 전년 동월 대비 14% 오르는 등 가파른 상승세를 타고 있다. 시장점유율도 LG전자가 미국 드럼세탁기 부문 10년 연속 1위를 내다보는 등 한국산의 위력이 거세다.
이런 상황에서 이번 판정은 최근 미국 내 강화되고 있는 보호무역주의를 반영한 결과라는 분석이다. 지난달 뉴욕에서 열린 한 철강업계 국제회의에서는 미국 업계와 관련 단체 대표들이 중국, 한국 등 아시아 철강업체들의 불공정 무역으로 큰 피해를 입고 있다며 보호무역 필요성을 집중 거론했다. 보호무역이 곧 공정무역이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대선 과정에서도 트럼프 현상 등 보호무역을 주장하는 후보들이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은 대선 정강정책 초안에 보호무역 공약을 담았다. 글로벌 무역관계에서 국익을 최우선으로 하자는 게 골자다.
이러한 기조는 수입규제 강화 움직임과 한국산 제품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 업체들의 제소로 이어지고 있다. 미 상무부는 최근 한국산 철강제품에도 반덤핑 관세를 부과했다. 미국 화학업체 이스턴케미칼은 지난달 한국산 가소제의 덤핑으로 피해를 보고 있다며 LG화학, 애경유화, 한화케미칼을 지목해 덤핑 제소했다. 구리모합금, 페로바나듐, 탄소 및 합금강판, 가소제 등 올해 들어서만 벌써 미국 내 4건의 반덤핑 및 상계관세 제소가 이뤄졌다.
상무부는 올해 지난해보다 많은 제소를 예상하고 관련 인력을 38명 증원했다. 미국은 특히 특정 구매자, 시기, 지역에 집중 덤핑 판매하는 ‘표적덤핑’과 수출가격이 내수가격보다 낮은 경우만 합산하고 수출가격이 내수가격보다 높은 경우는 '0'으로 처리해 전체 덤핑마진을 부풀리는 계산방식 ‘제로잉’을 적용해 고율의 반덤핑 관세를 부과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 같은 보호무역주의는 미국과 중국, G2를 비롯해 글로벌 경제 둔화를 배경으로 유럽의 브렉시트 등 세계 곳곳에서 확산되는 추세다.
재계 관계자는 “미국이 대선을 앞두고 보수와 진보할 것 없이 반자유무역 정서가 팽배하고 당국도 통상압력과 수입규제를 강화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며 “올해 중국에 이어 한국산에 대한 제소가 가장 많이 이뤄지고 있는 만큼 기업은 물론 정부 차원의 대응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코트라는 “최근 글로벌 경기 부진으로 각국의 비관세 장벽 등 보호무역 기조가 확산되고 있다”며 “한미 교역에 따른 미국의 수혜효과를 적극 홍보하는 등 통상정책 기조 변화를 면밀히 관찰하며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재영 기자 leealive@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