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지영기자]3년 전, 당시 대통령 직속 지역발전위원장이었던 이원종 전 대통령 비서실장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과 인연을 묻자 손사래를 쳤다. 40여년 지방자치에 몸담아온 자신의 전문성을 박 대통령이 알아봐 준 것 같다고 했다. 지역발전 전문가이자 행정가라는 자부심이 강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서울시청 사무관으로 시작해 관선 충북지사와 서울시장, 두 차례의 민선 충북지사까지 반평생을 지역 관료와 단체장으로 활동하면서 그는 한 순간도 한눈을 팔아본 적 없다. ‘정치에는 뜻이 없느냐’고 묻자 그는 “나는 행정가지 정치인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그 뒤로 2년 반 정도 지나 그가 대통령 비서실장에 임명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묻진 못 했지만, 이 전 비서실장이 왜 비서실장직을 맡기로 했는지 지역발전위원장 시절 모습을 떠올리면 알 것도 같았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할 기회를 얻은 것을 감사히 여기지 않았을까. 애초에 다음 자리를 염두에 두고 행정가로 복귀한 것이 아니기에, 박 대통령을 ‘끈’이라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전 비서실장의 마지막은 아름답지 못 했다. 지난달 ‘최순실 게이트’로 불리는 ‘비선실세 국정농단’ 의혹이 불거졌고, 이 전 비서실장은 국회 운영위원회에 불려가 야당 의원들의 추궁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그는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관련 의혹을 부정했다. 박 대통령 개인보단 국가라는 시스템을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산산이 깨졌다. ‘최순실 게이트’의 실체가 하나둘씩 드러났고, ‘봉건시대’ 발언은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에 떠돌며 조롱거리가 됐다. 이 전 비서실장이 느꼈을 자괴감과 실의는 상상조차 안 된다.
이 전 비서실장뿐일까. 미르·K스포츠재단과 직접적 관련이 있는 문화체육관광부, 정유라에게 특혜를 준 이화여대에 정부 지원사업을 몰아준 교육부, 그리고 모든 의혹의 몸통인 대통령 비서실에 근무했던 공직자들 중 ‘최순실 부역자’를 제외하고 최순실의 존재를 알던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자신들이 최순실의 설계를 실현하기 위한 부품인지 모른 채 자신들이 하는 일이 나라를 위한 일이라고 믿지 않았을까. 박 대통령과 최태민 일가의 관계는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새누리당 내에서도 최순실이 어떻게 국정을 농락했는지 아는 이는 거의 없었으니 말이다.
요즘 공직사회에는 무기력증이 만연하다. ‘내가 지금껏 최순실을 위해 일해왔단 말인가’, ‘다른 정책에도 혹 최순실이 개입했을까’ 한숨만 늘어간다. 그래서인지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정치적으로 사태가 해결된다고 해서 관료들의 ‘공직자로서 자부심’이 회복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특히 대통령 비서실의 별정직 공무원들은 인적 교체를 통한 정상화가 가능하겠지만 부처는 아니다. 부처 공무원들은 앞으로도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할 사람들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박 대통령의 머릿속에 ‘공직자들의 자존심을 치유해야겠다’는 생각은 없는 듯하다. 국정 주도권을 유지한 상태에서 사태를 해결해보려는 정치적 계산만 보인다. 이런 식으론 사태가 해결돼도 정부는 비정상 상태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공직자들이 사명감을 갖고 정부를 정상 상태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그들에게도 동기와 명분이 필요하다.
김지영 정경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