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재영 기자] 총수가 지닌 절대적 권한이 재벌그룹의 최대 맹점이다. 총수는 견제 받지 않고 경영권을 행사하기 때문에 횡령과 배임 등 각종 경제범죄와 함께 사익 추구의 유혹에 쉽게 빠진다. 특히 경영권 세습으로 영구적인 권력을 유지하기 때문에 전문경영인은 그 하수인으로 전락하기 쉽다. 때문에 법에 어긋나도 총수일가에 이익이 되는 행위가 버젓이 자행되며, 회사자금 전용도 서슴지 않는다. 비자금 조성도 단골 메뉴다. 이 같은 병폐는 모두 무소불위의 ‘황제경영’에서 비롯됐다.
황제경영을 가능케 한 근간은 내부출자다. 회사자금을 돌려 계열사를 무한정 늘릴 수 있다. 특히 3개 이상의 회사 지분이 순환형으로 연결되면 대주주의 지배력은 더욱 막강해진다. 총수는 주요 기업만 장악하면 순환출자 고리로 얽혀 있는 모든 계열사들을 지배할 수 있다. 이는 재벌에 대한 경제력 집중 문제를 심화시켰다. 규제와 인센티브 유도 등이 결합되면서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한 곳들도 많다. 하지만 삼성이나 현대차 등 굴지의 그룹들은 여전히 순환출자의 과제를 안고 있다.
황제경영이 가능한 또 다른 이유는 총수가 가진 대주주 지위를 세습하기 때문이다. 경영의 가족화와 세습이 황제경영의 한 형태이고 재벌이 비판받는 이유다. 재벌은 증여와 계열조정 등 갖가지 편법을 동원해 소유 지분을 승계하고 경영권을 세습한다. 증여세 납부 등 정상적인 상속 과정을 거쳐서는 경영권 세습이 어렵다. 황제경영과 경영권 세습은 불가분의 관계다. 가족 중심 경영이 견제 받지 않으면서 황제경영을 행사하게 만들고, 이는 다시 경영권 세습에 활용된다. 소유와 경영의 분리나 전문경영인이 그룹을 지배할 여지는 없다.
재벌은 경영권을 행사하면서도 그에 비례하는 책임은 지지 않으려고 한다. 총수 일가가 책임경영에 미흡한 양상은 수치로 드러난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총수가 있는 21개 대기업집단 소속 918개 계열사 중 총수 일가가 1명 이상 이사로 등재된 회사는 163개사에 불과했다. 총수 본인이 이사로 등재된 회사는 48개뿐이었다. 총수 일가의 이사 등재 비율이 낮은 곳은 현대중공업, 미래에셋, 삼성, 한화, 신세계 등으로 비교적 덩치가 큰 그룹들이었다. 재계 1위 삼성은 지난해까지 이사로 등재된 총수 일가가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1명뿐이었다. 올해 주총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등기이사에 올랐으나 최순실 게이트 사건에 연루돼 구속됐다.
총수 일가의 이사 등재 비율은 최근 수년간 감소세다. 2012년 27.2%, 2013년 26.2%, 2014년 22.8%, 2015년 21.7%에 이어 지난해에는 17.8%까지 떨어졌다. 등기이사에 대한 연봉 공개 등 정보공시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고 있어, 이를 피하고자 자리에서 물러난 것으로 의심된 사례가 적지 않다.
그나마 대기업집단 중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한 곳들의 경우 총수 일가 이사 등재 비율(22.2%)이 일반집단(14.7%)에 비해 높았다. 일반적인 그룹의 경우 출자구조가 평균 4단계이나, 지주회사는 지주-자회사-손자회사-증손회사 3단계 이내로 제한되는 등 상대적으로 지배구조 투명성이 확보된다. 한편으로는 순환출자보다 계열사에 대한 총수 일가의 지배력이 떨어질 수 있어,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이사 등재비율이 높을 수밖에 없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지주회사로 전환한 곳들도 황제경영의 그늘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의사결정 구조가 투명하다는 보장이 없다. 총수는 최상위 회사나 핵심 계열사에 대한 소수 지분만으로 그룹 전체에 대한 안정적인 경영권을 유지하고 있다. 책임보다 권한이 많은 것도 변함이 없다. 총수를 견제하려고 도입한 사외이사제 등의 제도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재벌그룹 사외이사 중에는 여전히 총수 일가와 학연·지연으로 엮이거나 회사 또는 경영진과 직간접적 이해관계가 형성된 경우가 많다. 심지어 감사위원의 90% 정도는 해당 회사 및 계열사 임직원 출신이 차지하고 있다. 이로 인해 이사회는 거수기 역할을 탈피하지 못한다.
공정위에 따르면 2015년 4월부터 2016년 3월말까지 1년간 민간 대기업집단 상장사 165개사의 이사회 안건 3997건 중 사외이사 반대 등으로 원안대로 통과되지 않은 안건은 16건에 불과했다. 16건 중 11건은 총수가 없는 포스코였다. 사외이사는 전직 관료 출신들이 많아 정경유착의 채널이 되기도 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의 발단이 된 재벌그룹들의 미르·K스포츠 재단 출연 과정에서도 이사회는 전혀 통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의사결정 구조를 개선하기 위한 여러 제도적 장치들은 마련돼 있으나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 대부분 강제력이 없기 때문이다. 사외이사추천위원회와 감사위원회는 자산 총액 2조원 이상 상장사에만 도입이 의무화돼 있다. 보상위원회나 내부거래위원회는 기업 자율에 맡기는 실정이다. 상법에는 오래 전부터 집중투표제나 전자투표제의 도입 근거가 마련됐지만, 재벌그룹들은 정관으로 이를 배제하고 있다. 집중투표제를 도입한 곳은 두 자릿수에 미치지 못한다. 전자투표제를 시행하고 있는 곳도 30여곳에 그친다.
정치권에서는 제도의 의무화를 위해 여러 법안들을 발의했지만 재계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 제도 도입시 경영권 방어가 어려워진다는 게 재계의 주된 반대 논리다. 하지만 적대적 M&A는 총수 독단 경영을 견제할 장치가 될 수도 있다. 비자금 조성 등의 불법이 반복되며 재벌 스스로 자정능력을 입증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황제경영을 견제할 제도 개선은 불가피하다. 재벌개혁 없이 경제민주화를 논할 수 없는 이유다.
이재영 기자 leealive@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