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지영 기자] 가습기살균제 사태 등 제조물의 결함으로 인한 사고가 발생했을 때 소비자가 제조업자로부터 적절한 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제조업자의 생산물배상책임(PL)보험 가입을 활성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11일 보험연구원의 ‘유통 표준계약서 개선을 통한 PL 리스크 관리 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에선 유통계약 시 제조업자 등 물품 공급자가 충분한 한도의 PL보험에 가입해야 한다는 조항이 포함된 계약서가 관행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미국에선 제조물의 생산·유통·판매에 관여한 자라면 누구든지 손해배상소송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유통업자가 제조업자의 과실로 인한 손해를 안 보려면, 소비자에 대신 손해를 배상하더라도 이를 다시 제조업자에 구상할 수 있도록 장치를 마련해둘 수밖에 없다.
반대로 우리나라에선 제조물 결함으로 인한 사고가 발생할 때 유통업자가 손해배상 책임을 지게 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다. 유통업자가 제조업자를 알지 못 하거나 알고도 피해자에게 알리지 않은 경우, 유통업자가 제조물 결함 발생에 기여한 경우를 제외하곤 책임이 면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통업자가 유통계약 시 제조업자에 PL보험 가입을 요구할 동기가 적다.
이는 소비자의 피해로 이어진다. 소비자가 손해배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대상이 제조업자에 한정되기 때문에, 손해배상 여력이 없는 제조업자가 PL보험에도 가입해 있지 않다면 소비자는 배상을 못 받을 수도 있다. 실제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지난 2016년 가습기살균제 제조업자인 세퓨에 5억4000만원의 손해배상을 판결했으나, 제조업자가 파산하는 바람에 피해자들은 손해를 배상받지 못 했다.
이에 연구진은 유통 표준계약서에 제조업자의 PL보험 가입을 요구하는 조항을 신설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현재 공정거래위원회가 관리하고 있는 물품공급계약 관련 18개 유통 부분 표준계약서에는 제조업자의 제조물사고 손해배상 책임에 대한 조항만 있고, PL보험 가입 요구에 대한 조항은 없다.
최창희 연구위원은 “제조업자의 PL보험 가입을 의무화하는 게 소비자 입장에선 가장 좋겠지만, 제조업자들에게 과도한 부담이 될 수 있다”며 “대신 계약자들이 자율적으로 고칠 수 있는 표준계약서를 통해 PL보험 가입을 요구·확인할 수 있도록 하면 제조업자들의 부담을 덜면서 PL보험 가입이 필요하다는 인식도 확신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가습기살균제피해자와가족모임 등 관계자들이 지난달 12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가습기살균제 참사 관련 공정위 조사 결과 발표에 대한 피해자와 가습기넷 입장 발표 기자회견'에서 솜방망이 처벌 규탄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김지영 기자 jiyeong8506@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