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기태의 경제편편)약속은 길게, 이행은 짧게?

입력 : 2018-04-18 오전 6:00:00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지난 2008년 4월22일 경영 쇄신안을 발표했다. 차명계좌를 실명 전환하고 세금을 납부한 뒤 남는 돈은 사회에 유익한 일에 쓰겠다고도 약속했다. 이건희 회장은 당시 삼성특검에 의해 비자금 의혹에 관한 수사를 받고 기소되자, 이 같은 입장을 발표했다. 당시 비등하던 비판여론에 나름대로 내놓은 대답이었다. 다만 삼성생명 주식은 대상에서 제외했다. 삼성그룹 지배구조에서 삼성생명이 중추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삼성에 비판적인 사람들을 포함해 그 누구도 삼성의 방침을 비판하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단지 이건희 회장과 삼성이 약속대로 할 것인지 지켜보겠다는 자세였다.    
 
이건희 회장의 그런 사회 환원 약속이 발표된 지 벌써 10년이 흘렀다. 그러나 사회 환원 약속은 아직 이행되지 않고 있다. 어떤 후속 움직임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행은커녕 도리어 차명계좌의 자금을 몰래 인출한 사실이 지난해 국정감사 과정에서 드러났다. 게다가 이건희 회장의 차명계좌에 대해서는 과징금이나 세금조차 제대로 물리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국민의 불쾌감과 공분은 커졌다. 금융당국이 이건희 회장 차명계좌의 존재를 알고도 사실상 방치해왔을 것이라는 의심까지 생겼다. 단지 올 들어 차명계좌에 소득세와 과징금을 부과하겠다고 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렇게 10년이 흐르는 사이 참으로 많은 일이 벌어졌다. 삼성특검에 의해 기소돼 법원으로부터 실형을 받았던 이건희 회장은 이명박정부에 의해 사면됐다. 단 한 사람만을 위한 원포인트 사면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난 2014년 갑자기 병을 얻어 쓰러졌다. 회장 유고상태가 되자 삼성의 경영권 승계작업은 가속화됐다. 특히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은 삼성물산을 사실상 지주회사의 위상을 갖게 해줬다. 그런 과정에서 삼성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에 연루됐다. 이로 인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1년 가까이 영어의 몸이 되기도 했다. 풀려난 이재용 부회장은 이제 사실상 삼성그룹의 총수로서 불가역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   
 
반면 이건희 회장은 안타깝게도 여전히 병석에 누워있다. 더 이상 차명계좌의 사회 환원 문제에 관해 따질 수도 없게 됐다. 이재용 부회장은 지난해 국정농단 사건에 관한 국회 청문회에 출석해 사회환원 약속을 이행할 시기를 놓쳤기 때문이라고 답변했다. 삼성이 차명계좌를 몰래 인출해 간 것으로 드러난 사실에 비춰볼 때 이재용 부회장의 이런 설명을 수긍하기는 어렵다. 애초부터 이행 의지는 없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기만 기다려 왔을 것이란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중세 서양의 시성 단테가 남긴 불멸의 명작 <신곡>에서 주인공 단테는 지옥을 탐방하다가 수도사 몬테펠트로를 만난다. 자신을 찾아온 교황에게 “약속은 길게 하고 이행은 짧게”라는 계책을 알려준 수도사였다. 달콤한 말로 상대를 구워삶고 목적을 달성한 후에는 약속을 이행하지 말라는 계책이었다. 교황은 그 계책대로 한 결과 목표를 달성했다. 이건희 회장의 사회 환원 약속도 이와 같이 되는 것이 아닐까 걱정된다.  
 
그렇지만 그 약속은 아직 국민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 그 약속의 이행 책임은 실질적인 삼성 총수인 이재용 부회장이 승계했다고 할 수 있다. 과정이야 어떻든 아버지로부터 그룹 경영권을 사실상 이어받았으니 약속 이행 책임도 떠맡아야 하는 법이다. 그 누가 대신해 줄 수도 없다. 
 
사실 이건희 회장의 사회 환원 약속 이행 문제는 국민의 자존심 문제이기도 하다. 자꾸만 그 약속을 이행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국민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 그러니 그런 요구를 계속해서 되풀이할 수도 없다. 구차할 뿐이다. 우리나라의 국민소득이나 재정 규모를 보더라도 이건희 회장이 약속한 사회 환원 자금이 없다고 별로 곤란할 것은 없다. 그러니 설사 이재용 부회장과 삼성이 이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크게 아쉬울 것은 없다.
 
결국 이행하고 안 하고는 이재용 부회장과 삼성의 결단에 달려 있다. 그 누가 강요하거나 간청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행한다면 바람직하겠지만, 하지 않는다 해도 그만이다. 이행하지 않겠다고 할 경우 이재용 부회장과 삼성이 기업 이미지 추락과 지탄의 목소리를 감수할 각오만 돼 있으면 된다.
 
이제 이재용 부회장은 이 문제에 관해 조속히 결단을 내리는 것이 현명해 보인다. 이행하겠다거나, 않겠다거나 의사 표시를 분명히 하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두고두고 따라다닐 것이다. 애매함과 불확실성은 없거나 작을수록 좋다.
 
차기태(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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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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