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 눈 가리는 사회)②“있는 점자도 제대로 표기 안돼”

“가전제품 364개 중 점자표시 고작 3개”

입력 : 2018-05-15 오전 6:00:00
[뉴스토마토 박용준 기자] 시각장애인이 일상에서 느끼는 점자 등 대체정보의 미흡 문제는 상상 이상으로 심각한 상태다. 이는 지석봉 안마사의 사례를 넘어 시각장애인의 청와대 청원까지 불러왔으며, 전문 연구조사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정보화 시대? 먼 나라 얘기”
 
지난 3월, 자신을 시각장애인이라고 밝힌 A씨가 청와대국민신문고 게시판에 청원을 올렸다. 대중교통 수단인 버스와 터치패드로 일관된 가전제품에 대한 불편 토로였다. ‘시각장애인의 정보접근권을 보장 해주세요’라는 제목의 청원에서 A씨는 “정보화 시대라고들 한다. 하지만 시각장애인들에게는 너무나 먼 나라 이야기”라고 말했다.
 
청원에서 A씨는 “버스 정류장에 가서 몇번 버스인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터치식 세탁기는 사용 할 수 없다”, “밥솥도 터치식이 나오는데 음성이 나오지 않는 모델이 많다”, “보일러도 마찬가지로 온도를 알수가 없다” 등의 불편을 호소했다. A씨는 “시각장애인들의 정보 접근권이나 취업에 어려움을 겪는다. 미국 처럼 어떠한 제품이라도 시각장애인에게 필요한 제품을 지원 해주셨으면 한다. 구청에 신청을하면 본인 부담금을 소득에 맞게 정해서 지원해주면 좋겠다”고 주장했다.
 
“시각장애인이라면 누구나 공감”
 
아쉽게도 30일동안 20만명이라는 많은 국민의 호응을 얻어야 정부 측의 답변을 얻을 수 있는 청원제도상 A씨의 청원은 5102명이라는 숫자를 기록한 채 지난 4월 마무리됐다. 비록 미세먼지, 여성, 아동, 세월호 등 다른 사회적 이슈에 비해 파괴력은 약했지만, 장애인 관련 청원 중엔 손꼽을 정도로 많은 호응을 얻었다. 또 시각장애인에 대한 관심 자체가 적은 현실 속에 A씨의 청원은 많은 시각장애인의 호응과 시민들의 관심을 불러오며, 시각장애인 대체정보 제공 문제를 환기했다. 시각장애인단체 관계자는 “시각장애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얘기”라며 “20만명이라는 숫자를 채우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그 숫자 이상으로 중요한 문제”라고 말했다.
 
실제 시각장애인들이 일상에서 접하는 가전제품, 편의시설, 생활용품 등에 가장 기본적인 정보도 점자나 음성 등으로 제공되지 않고 있다. 14일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와 국립국어원이 지난해 연구한 점자표기기초조사에 따르면 조사대상 가전제품 364개 가운데 점자가 정확하게 표기된 제품은 단 3개에 불과했다.
 
생활가전제품 태반이 점자 표시 없어
 
연구진은 청소기, 전기다리미, 세탁기, 믹서기, 전기매트, 밥솥, 에어컨, TV 등 시각장애인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가전제품 20개 품목 364개 제품을 선정해 점자 위치와 내용, 적정 여부 등을 조사했다. 조사결과, 364개 제품 가운데 점자 표기가 된 제품은 세탁기 1개, 비데 4개 등 단 5개 제품이었다. 그나마 이들 5개 중에서도 점자 높이가 너무 낮거나 내용을 읽을 수 없는 제품 2개를 제외하면 세탁기 1개, 비데 2개만이 기준을 충족했다. 하이메이드에서 만든 세탁기 1개 제품은 전원과 동작·일시정지 버튼 옆에 점자를 표기했으며, SK매직이 만든 비데 2개 제품은 세정, 비데, 정지등 주요 버튼 위에 점자를 표기했다.
 
생활용품도 사정은 비슷했다. 세제, 유연제, 샴푸, 캔음료, 지폐, 신용카드 등 10개 품목 255개 제품을 조사한 결과, 점자 표기가 된 생활용품은 캔음료, 샴푸, 린스, 신용카드 등 극히 일부 품목일 뿐이다. 그 중에서도 캔음료는 뚜껑 따개 아래쪽에 점자가 위치해 시각장애인이 점자를 읽기에 곤란했으며, 점자 내용도 ‘음료’, ‘탄산’이라고 적혀 큰 의미를 부여하기 어려웠다.
 
정확한 표기, 아사히맥주·미장센·신한카드 정도
 
다만 아사히맥주, 미장센샴푸, 미장센린스, 신한카드는 점자 표기와 식별 모두 만족할만한 수준이었다. 신용카드의 경우 KB국민카드, 우리카드 등 일부 신용카드사에서는 원하는 경우 점자 스티커를 제공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편의시설 조사결과는 그야말로 기대 이하였다.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에 따라 점자표지판과 점자안내판(음성안내장치 포함) 등을 반드시 설치해야 하는 자치센터, 보건소, 우체국, 파출소, 지구대 등이 조사대상이었다. 서울 주민센터 25곳을 조사한 결과,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할 점자표지판과 점자안내판 총 661곳 가운데 제대로 설치된 것은 단 17곳(2.6%)뿐이었고, 253곳(38.3%)이 부적정, 아예 설치되지 않은 곳이 391곳(59.1%)이다. 특히, 주출입구 계단과 경사로, 내부시설 계단과 승강기 내부는 점자 규격이 맞지 않거나 유지 관리가 되지 않아 단 1곳도 제대로 읽을 수 없었다.
 
파출소·지구대, 제대로 된 점자 찾기 어려워
 
이밖에 보건소 6곳 조사에서도 점자표지판과 점자안내판 총 170곳 중 단 8곳(4.7%)만이 기준을 충족했으며, 60곳(35.3%)은 부적정, 102곳(60%)은 아예 설치되지 않았다.
 
우체국 17곳 조사에서 적정하게 설치된 곳은 단 1곳도 없었으며, 파출소 10곳 조사에서도 적정하게 설치된 곳은 한 곳도 없고, 지구대 8곳 조사에서도 6.1%에 그쳤다.
 
연구진은 “연구 결과 시각장애인이 생활환경에서 점자를 거의 접할 수 없고, 그로 인해 시각장애인의 점자 사용 권리가 제한되어 삶의 질이 저하되며,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법과 제도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 시각장애인이 점자정보단말기를 활용해 장애인 인권 헌장을 낭독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박용준 기자 yjunsay@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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