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우리는 망각한다. 좋아하는 것을 지킨다는 게 실은 굉장한 노력이 필요하단 사실을. 가끔 아니 자주 잊곤 한다.
부단한 채찍질로 이런 인간의 망각 작용을 거스르며 살아온 이들이 있다.
"좋아하는 것을 하더라도 늘 초심을 중히 생각합니다. 저를 돌아보게 되고 목표도 잊지 않게 되죠. 무엇보다 제 스스로를 더욱 믿게 됩니다."(드러머 타츠·29)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마음가짐을 항상 품고 음악을 합니다. 노력이 없다면 아무리 좋아하는 마음이라도 쉽게 변질되기 때문이죠."(기타리스트 카즈키·31)
지난 3일 오후 3시반 서울 광진구 예스24라이브홀 대기실. 인터뷰 1시간 내내 몇 마디 없던 두 멤버가 나란히 입을 열었다. 지난 13년간 ‘메탈 외길’을 걸어온 밴드 크로스페이스 만의 남다른 신념이었다.
지난 3일 예스24라이브홀에서 첫 단독 공연을 연 크로스페이스. 사진/소니뮤직코리아
2006년 결성된 밴드는 결성 초기 열정을 여전히 가슴 속에 품고 있다. 터프한 사람들이 많은 고향 오사카 남부 사카이, 불꽃 튀기는 경쟁과 누구보다도 최고이고 강한 밴드여야 했던 나날들. 오사카 외곽 지역에서 젊음을 바친 이 다섯 청춘의 음악은 곧 도쿄로, 세계로 뻗어나갔다. 이제는 미국과 영국, 독일 록 페스티벌의 단골 손님이 됐고, 유럽을 횡단하는 투어에도 나서고 있다.
“처음부터 꿈이 구체적으로 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저 저희가 살던 지역이 강하지 않으면 안 되는 환경이었고, 그래서 매 순간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그때 가졌던 열정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변치 않고 있습니다. 변두리에서 키우던 꿈이 여기까지 흘러 이르게 된 것이죠.” (베이시스트 히로·29)
카즈키와 코이에(리드보컬·31), 테루(서브보컬, 키보드, 프로그래밍·31)는 초등학교 동창이다. 어린 시절 셋은 ‘즐거운 음악’을 해보자 했고, 뒤늦게 타츠와 히로가 합류해 지금의 진영이 갖춰졌다.
린킨파크와 림프비즈킷을 좋아했던 코이에, 케미컬 브라더스나 프로디지를 커버하곤 했던 테루, 슬립낫을 즐겨 듣던 타츠. 멤버들 각자의 플레이리스트는 조금씩 달랐으나 이들은 서로의 취향을 존중하고 공유했다. 그 교집합은 점차 밴드명처럼 교차했고, 밴드 만의 색깔이 됐다.
“저희도 그렇지만 음악에 대한 개인의 신념이나 취향은 모두가 다르지 않습니까. 그런 면들이 서로 중첩되고 섞이는 게 우리 음악이란 의미로 밴드명을 짓게 됐습니다. 헤비한 사운드에 댄서블함을 가미한 우리 만의 음악은 아마 세계 어디에나 있는 음악이 아니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테루)
드러머 타츠(왼쪽)와 기타리스트 카즈키. 사진/소니뮤직코리아
메탈 록과 감각적인 신스, 절규에 가까운 스크리밍은 이들 음악의 뚜렷한 표식이다. 거칠고 하드한 음악 장르를 한데 담아 ‘트렌스 코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힙합과 팝, 댄스 뮤직이 범람하고 있는 오늘날 현실에 아랑곳 않고, 자신들의 음악을 하나의 장르화시켰다.
‘디스토피아(Distopia)’, ‘데빌스 파티(Devil's Party)’, ‘카운트다운 투 헬(Countdown to Hell)’. 곡 제목들은 세계 종말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어둡고 무겁기만 한 메시지는 아니다. “메탈밴드이기 때문에 그런 오해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분노나 화를 표출한 곡들은 맞지만 그걸 모두 어둡다고 생각 하진 않아요. 현상에 대한 안타까움을 노래하지만 용기와 희망도 말하고 있으니 긍정적인 부분도 보실 수 있을 겁니다.”(코이에)
“‘카타스트로피(catastrophe)’ 같은 곡은 ‘나를 불태워 달라’는 가사가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스스로를 태워 각성하겠다는 메시지에요. ‘와일드파이어(Wildfire)’ 같은 곡도 용기를 북돋아 주는 노래고요. 외부 압력에 대한 반항이지만 새로운 세계를 모색해 간다는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히로)
보컬 코이에. 사진/소니뮤직코리아
최근 한국에서는 오래 활동한 밴드들이 연이어 해체되고 있다. “밴드 피아와 함께 공연을 한 적이 있다”던 멤버들은 이들의 해체 소식을 듣더니 깜짝 놀라며 아쉬워했다. 일본에서는 아직까지 다양한 장르가 존중 받고 있다는 말도 더했다.
“일본 음악계는 엑스재팬, 미스터칠드런 같은 선배 팀들이 록의 뿌리를 제대로 내려준 영향이 아직까지 크다고 생각합니다. 현재도 일본은 록을 대중 음악의 주 장르로 받아들이고 있고, 다양한 세부 장르들도 존재합니다. 저희의 밴드명처럼 여러 사람의 취향과 신념이 교차하는 형태라고 할 수 있죠.”(테루)
“한국에서 록이 마이너 장르라는 걸 알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 관객들은 폭발력이 어마어마합니다. 2년 연속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에 출연하면서 그 굉장한 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코이에)
헤드벵잉을 하며 폭발적으로 베이스를 두드렸던 히로(앞)과 댄서블한 신스를 연주하는 테루. 사진/소니뮤직코리아
이날 저녁 크로스페이스의 공연은 압도적이며 폭발적이었다. 변두리에서 고민하고 다듬은 젊음의 소리가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듯 했다. 히로는 헤드뱅잉을 하며 폭발적으로 베이스를 두드렸고, 타츠는 폭주 기관차처럼 서서 스네어와 심벌을 난타했다. 코이에와 테루가 난사하는 스크리밍이 앰프에서 터져 나올 때 관객들은 원형을 그리며 몸을 격렬하게 부딪히는 슬램도 마다 않았다.
“외국에서의 공연은 늘 흥분되고 재밌습니다. 무대에 오를 때마다 꿈을 이뤘다고 생각합니다.”(테루)
오사카 ‘변두리’에서 치열하게 갈고 닦은 다섯 청년의 노력과 열정, 그리고 꿈. 그 꿈의 음악은 지금 유라시아 대륙을 시작으로 세계를 횡단 중이다. 앞으로 “다섯 대륙을 제패하고 싶다”는 히로의 말이 끊어지기 무섭게 코이에는 더 큰 꿈의 지도를 눈 앞에 펼쳐 보였다.
“우주에서도 공연을 해보고 싶습니다. 달에서 공연하겠다는 레이디 가가처럼요. 세월이 흘러도 지금의 열정은 계속될 겁니다. 더 유명해지려고 하기보단 젊은 청년들에게 힘을 줄 수 있는 그런 밴드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