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지난 7일 고석정행 '평화열차('DMZ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 2019'로 향하는 셔틀버스)'에 올랐다. 지구 상 모든 경계가 허물어지는 듯 했다.
국경과 정치, 이념, 인종을 구분하는 선은 그 곳에 없었다. '탈(脫)'로 시작하는 모든 것과 음악 만이 있었다. 한국인부터 중국인, 미국인, 프랑스인, 덴마크인 등이 탑승한 버스에선 저마다의 언어를 주고 받았다. 다양한 국적의, 장르불문 노래는 배경음처럼 릴레이식으로 이어졌다.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전 멤버이자 전설적인 뮤지션 존 케일과 덴마크 아트펑크를 표방하는 록 밴드 아이스에이지의 이름을 나열하며 기대에 부푼 이들도 쉽게 눈에 띄었다.
합정에서 출발한 '평화 열차'는 5시경 고석정에 떨어졌다. 운행 시간은 대략 한시간 반 남짓. 관객들은 분주하게 다음 열차(노동당사행 셔틀버스)로 갈아탔다. 이날의 '백미' 개막공연이 그 곳에서 열리기 때문이었다. '우정의 무대'란 타이틀의 공연에서는 군가를 재해석할 예정이었다. 공연 20분전, 노동당사 뒤편으로 가보았다. 백색 옷에 투명 고글을 착용한 무리들이 흐느적 거리며 안무를 맞춰보고 있었다.
"굿 이브닝 웰컴" 영국의 전설적인 음악 축제 글래스톤베리의 메인 기획자 마틴 엘본이 등장하자 분위기가 무르익기 시작했다. "작년에 이어 2년 연속 한국에 오게 돼 영광입니다. 올해는 오랜 전쟁으로 암흑기를 거친 레바논의 앤써니 세만 베이루트 잼 세션 대표까지 오셔서 그 의미가 더 큰 것 같습니다. 여러분, 이 말로 마무리하겠습니다. 평화, 통일!"
노동당사 앞에서 열린 '우정의 무대'. 사진/사단법인 피스트레인
엘본의 축사를 이날 공연 연출자 장영규 감독이 이어받았다. "저는 군가를 소재로 철원의 지역성과 역사성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전쟁과 폭력성으로 기억되는 이 노동당사가 시간을 거치면서 어떻게 역설적으로 평화를 상징하게 됐는지 말할 겁니다."
'우리는 대한의 독립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 나가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독립운동가 한형석이 쓴 '압록강 행진곡'을 김해원이 노래했다. "추풍령아 잘 있거라/우리는 돌진한다"는 '전우여 잘 자라'를 2절까지 부를 무렵, 김사월이 등장했다. 총탄과 포탄, 전차 자국이 안팎으로 남겨진 이 구조물을 뒤로 하고 그는 안개 같이 자욱한 음성으로 읊조렸다.
김지원, 백현진도 '압록강 행진곡', '사나이 한목숨', '빨간 마후라' 등을 부르며 무대에 차례로 합류했다. 트럼펫, 콘트라베이스, 퍼커션 등으로 구성된 빅밴드는 재지한 사운드로 곡을 쉴새없이 변주했다. 현대무용팀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는 노동당사 앞에 일렬로 서서 넥타이를 휘날리는 식의 해학적 퍼포먼스를 펼쳐보였다. 지금까지 알던 굳세고 호전적인 군가는 거기 없었다. 아련하고 우스꽝스럽고 때론 절규처럼 뿜어지는, 이 노래는 군가 아닌 군가였다. 장영규 감독은 "노동당사에서 군가를 부르는 이 공연은 역설적으로 전쟁의 폭력성을 지워내기 위한 프로젝트였다"며 "우스울 만큼 맹목적인 군가를 비틈으로써 폭력성을 해체하는 '탈이데올로기'에 공연의 목적이 있다"고 했다.
노동당사 앞에서 열린 '우정의 무대' 공연. 사진/사단법인 피스트레인
이날의 역설은 이후 다양한 형태의 '탈'의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전야 공연에는 나이지리아 밴드 쿠티 앤 이집트 80과 스페인에서 온 밴드 사비 사리아, 쿠바 출신의 구암파라 뮤직 등 다양한 국가에서 건너 온 음악들이 울려 퍼졌다.
8일 대한민국 최북단 월정리역에서는 '철로 위의 노래'가 연주됐다. 탈북 피아니스트 김철웅, 포크 듀오 우주왕복선싸이드미러, 싱어송라이터 정밀아가 어쿠스틱한 사운드를 선보였다. 벨벳언더그라운드의 전 멤버 존 케일은 정밀아와 함께 듀엣곡 '프로즌 워닝(Frozen Warning)'과 '하트브레이크 호텔(Heartbreak Hotel)'로 평화를 노래했다.
덴마크 출신의 아이스에이지. 사진/사단법인 피스트레인
"사랑과 평화, 중요하죠. 하지만 쉽지 않죠? 그럴 땐 술을 마셔야죠."
다음날 오후 2시반경, 누군가가 무대 위에서 막걸리를 번쩍 치켜들었다. 대만 매스록 밴드 엘리펀트 짐의 케이티(베이스·보컬). "당신들 이거 뭔지 알아요? 이거 한국 술 맞죠? 잇츠 소 딜리셔스!"
이름에 '술'이 들어간 건 또 어찌 알았는지. 이들은 밴드 '술탄 오브 더 디스코'를 좋아한다 했다. "다음 곡은 '솔트 비어 팩토리(Salt Beer Factory)'입니다."
이날 오후 5시20분경에는 '아트펑크'를 표방하는 덴마크의 록 밴드 아이스에이지가 무대에 올랐다. 보컬 엘리아스 벤더 로넨펠트는 별다른 멘트 없이 시크하게 노래에만 충실했다. 무대 중간 중간에는 비닐봉지를 머리에 쓰는, 다소 충동적으로 보이는 퍼포먼스도 선보였다. 셋체인지마다 상상도 못할 경계를 넘나드는 다양한 실험적 요소가 눈에 띄었는데, 느닷없이 가스펠 사운드나 개 짖는 소리가 스피커에서 튀어 나오곤 했다.
'선을 초월한다'는 축제의 슬로건을 닮은 음악 향연은 마지막 거장들 무대까지 이어졌다. 데뷔 40주년을 넘어선 한국 포크의 거목 정태춘·박은옥, 벨벳언더그라운드의 전 멤버 존 케일의 공연을 보기 위해 관객들은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특히 올해로 77세의 나이에도 거뜬하게 무대에 오른 존 케일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명곡 '하트브레이크 호텔(Heartbreak Hotel)'로 무대를 열어 젖혔다. 게스트로 오른 황소윤과 눈을 맞추며 '쉽 오브 풀스(Ship of Fools)'도 연주했다. 벨벳언더그라운드의 곡 '아임 웨이팅 포 더 맨(I'm Waiting for the Man)'을 피아노로 연주할 때는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인도 출신의 영국 조각가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이 연상되는 조명들은 무대 뒤에 상시적으로 나부꼈다. 서로 다른 크기와 색조의 불그스름한 직사각형 조명들이 스노우 노이즈처럼 쩍쩍 갈라지며 움직였다.
취재 중 만난 미국 출신의 앤드류 살먼 아시아 타임스 기자는 "존 케일과 아이스케이지를 보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며 "DMZ 페스티벌이 전반적으로 우수한 실력의 신인 뮤지션부터 레전드 대열에 이르는 이들까지 골고루 라인업을 짠 것 같다"고 했다.
황소윤과 존케일. 사진/사단법인 피스트레
공연 중 본지 기자는 이 페스티벌이 지닌 평화 상징성에 관해 몇몇 외국인들에게 묻기도 했다. 살먼 기자는 "북한과 남한은 세계에서 가장 극복하기 힘든 분단 상황에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며 "DMZ를 한 민족, 두 국가가 이렇게 마주보고 있는 일이 굉장히 아이러니하다"고 했다.
다만 그는 정치와 문화, 이상과 현실은 구별해서 봐야한다는 지적을 더했다. 살먼은 "바닥부터 할 수 있는 활동의 연장선상에 이 페스티벌의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서도 "다만 페스티벌을 통일이나 정치적 관점으로 연결짓기는 무리가 있는 것 같다. 어디까지나 상징과 현실은 명확히 구분돼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덴마크 출신의 한 프리랜서 사진기자는 "평화 프로세스를 구축하는 일은 북한과 남한, 미국 정치인들이 협상을 통해 끌어내는 일"이라며 "이곳에 실제로 온 몇몇 사람들이 '평화'에 관한 구체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른 페스티벌과 어떤 차이가 만들어지는지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미국 출신의 토마스 마레스카 UPI 기자는 "1년 전만 해도 지금보다는 더 희망적인 분위기가 있었던 것 같다"며 "페스티벌 자체로 볼 땐 아직 메시지적으로 긍정적인 부분은 남아있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올해 강원도 철원 일대에서 열린 페스티벌에는 주최 측 추산 총 1만5000여명이 몰려 들었다. 강원도와 철원군, 서울시, 사단법인 피스트레인이 공동 주최를 맡았다. 김미소 피스트레인 뮤직 페스티벌 총감독은 “피스트레인 뮤직 페스티벌이 강원도와 철원군의 재정 지원을 받는 공공음악 페스티벌인 만큼 해 마다 철원의 의미 있는 장소에서 새로운 감동을 관객들에게 선사하고 싶다”며 “올해 관객들이 보여준 관심과 뜨거운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 한층 더 평화로운 페스티벌로 찾아뵐 것”이라고 말했다.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