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밴드씬의 ‘찬란한 광휘’를 위해 한결같이 앨범을 만들고, 공연을 하고,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TV를 가득 메우는 대중 음악의 포화에 그들의 음악은 묻혀지고, 사라진다. ‘죽어버린 밴드의 시대’라는 한 록 밴드 보컬의 넋두리처럼, 오늘날 한국 음악계는 실험성과 다양성이 소멸해 버린 지 오래다. ‘권익도의 밴드유랑’ 코너에서는 이런 슬픈 상황에서도 ‘밝게 빛나는’ 뮤지션들을 유랑자의 마음으로 산책하듯 살펴본다. (편집자 주)
지난 5월 발매된 밴드 넘넘의 EP '넘'. 사진/붕가붕가레코드
지난 5월 어느 날, 애플뮤직을 쥔 손가락이 잠시 멈칫했다. 눈 앞에 흥미로운 사각 프레임이 펼쳐졌다. 북유럽 느낌의 숲 속과 간헐천 같이 피어오르는 연기, 뱅크시처럼 얼굴을 공개 않는 의문의 세 사람. 그림을 하염없이 쳐다보다 손가락은 절로 플레이 버튼을 향했다. 재생.
‘와. 이거 뭐지?’
찢어질 듯 삐걱대는 기타 노이즈는 꼭 90년대 활동하던 소닉유스 같았다. 광인처럼 앙칼진 보컬 목소리는 신디 로퍼 만큼이나 개성이 넘쳤다. 허겁지겁 유튜브에 접속해 이들을 뒤따랐다. ‘헬(지옥)’과 ‘머더(살인)’ 글씨가 나부끼는 벽을 배경(‘째깍째깍’ 뮤직비디오)으로 이들이 고개를 내민다. 커팅된 청바지와 헐렁한 상의, ‘뉴트로 룩’을 한 이들은 베이스와 기타를 쥐고 음악 삼매경이다. 자명종을 울리고, 분무기를 뿌리고, 대낮 잔디 위 모닥불에 불을 피우는 알 수 없는 행동도 한다. ‘와… 이건 또 뭐지?’
지난달 31일 이 영상 속 미스터리한 장소에서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곳은 한강변을 등진 어느 언덕길 위에 있었다. 삐삐밴드 출신이자 스타일리스트로 활동 중인 이윤정의 개인 작업실이자 밴드 넘넘(numnum·이윤정[보컬], 이재[베이스], 이승혁[기타, 프로듀싱])의 음악이 다듬어진 곳. 문을 열고 들어서니 영상 속 ‘날 것’ 같던 이미지가 눈 앞으로 다가온다. 등에 바둑 문양이 찍혀 있는 고양이가 방바닥을 자유롭게 구르고, 옷과 패션 소품들이 발 디딜 공간이 없을 정도로 방에 빼곡하다.
삐삐밴드 출신이자 넘넘의 보컬 이윤정. 사진/붕가붕가레코드
“안녕하세요. 여기는 제 개인 작업실이자 넘넘의 음악이 만들어지는 곳이에요. 제가 24년 정도 스타일리스트로도 활동하고 있거든요. 보시는 것처럼 방에 이런 것들이 많아요.”(윤정)
그는 시대를 선도했던 록 그룹 ‘삐삐밴드’의 주역이다. 1995년 밴드의 1집 ‘문화혁명’은 말 그대로 혁명이었다. ‘안녕하세요? 오오~ 오오’(‘안녕하세요’)를 외치며 등장한 이 그룹은 ‘껌을 씹는 유쾌한씨를 보라(‘유쾌한 씨의 껌 씹는 방법)’며 기성세대의 사고 틀을 완전히 와해시켰다. X세대의 새 시대를 선언했다. 온갖 전위적이고 실험적이던 이들의 음악 세계는 20여년의 세월을 훌쩍 건넌 지금도 전혀 촌스럽거나 어색하지 않을 정도.
“당시 참 인위적이라는 말도 많이 들었지만, 그렇지 않았어요. 저희는 그냥 그때의 모습 그대로를 무대에서 펼친 것이었거든요. 시대가 지나도 촌스럽지 않다고 느껴주시는 건, 아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윤정)
1995년부터 1997년까지 활동했던 삐삐밴드는 지난 2015년 재결성하고, 20주년 기념 공연도 가졌다. 이 때 이윤정은 무대를 도와주러 온 베이시스트 이재와 새로운 밴드를 결성해보고자 했다. 음악적으로 친분이 있던 이승혁이 프로듀싱, 기타로 참여하면서 지난 2016년 ‘넘넘’이라는 팀이 만들어졌다.
별다른 이유나 상징이 있을 거라는 얄팍한 예상은 무너졌다. 넘넘은 삐삐밴드처럼 ‘있는 그대로’의 밴드였다. 이 곳을 작업실로 택한 것도 특별해서가 아니다. 나머지 멤버들이 사는 홍대와 방배, 그 중간 지점이기 때문이다.
“팀명도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 보단 단어 그 자체에 집중하다 나왔어요. ‘넘넘’은 서로가 서로를 잘 모르는 남남의 방언이에요.”(윤정)
밴드 넘넘의 이승혁과 이재. 사진/붕가붕가레코드
나이도, 성장 배경도, 취향도 다른 세 사람은 공통 분모가 그다지 많지 않다. 덕분에 서로 다른 개성들이 뒤섞이는 새로운 화학 작용이 발생한다. “승혁과 이재, 저의 취향은 완전히 다르죠. 승혁인 힙합도 가까이 하는 친구고 이재는 스킬이 뛰어난 록 음악을 즐겨 들어요. 저는 조이 디비전이나 메시브어택 같은 다크한 스타일을 좋아해요.”(윤정) “가끔은 서로 추천해주고 공유하면서 새로운 취향을 발견하는 것도 같아요. 예전에 조이 디비전을 추천해주셨는데, 들어보니 생각지도 못한 제 취향이었어요.”(이재)
넘넘의 기타리스트 이승혁은 힙합을 ‘음악적 뿌리’로 두고 있다. 기타를 배운 지는 몇 개월 되지 않았다. “힙합이 지금 너무 주류라 꺼려지는 게 있어요. 모두가 힙합을 하는 상황이 좀 싫었던 거죠. 넘넘으로 라이브를 해야 하다 보니 기타를 들었지만 튀고 싶고 새롭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승혁) “삐삐밴드 전에는 저도 스눕독, 바비 브라운, 자넷 잭슨 같은 뮤지션들을 좋아했어요. 승혁이가 그런 힙합스러운 색채들을 팀에 더 불어 넣어줬으면 해요.”(윤정)
밴드 넘넘. 사진/붕가붕가레코드
넘넘의 곡 작업은 서로의 화학작용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다. 이재나 이윤정이 스케치하는 사운드를 이승혁이 캐치해 프로듀서로서 다듬고 정리한다. 루프 기반의 힙합적 코드나 라인 등의 작법을 활용하기에 합주나 잼 형식으로 곡을 쓰는 전형적 록 밴드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있다. ‘있는 그대로’를 꺼내놓고 뒤섞고 조립하는 게 그들과 그들의 음악이다.
‘째깍째깍’ 뮤직비디오 영상 속 ‘힙스터’ 같은 이미지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것 역시 ‘있는 그대로’ 였을까. “힙 하다기 보다 저희는 어떤 상황에 끼지 않으려 하는 것, 그냥 일부러 멋 부리지 않으려는 것 같아요.”
“(‘째깍째깍’은) 비용을 정말 많이 들였음에도 두 번이나 실패한 후 나온 영상이었죠. 세 번째 촬영 때는 아이돌 뮤비 같지 않게 그냥 우리의 일상을 편안하게 찍어달라 했어요. 소품 같은 것들도 다 여기 저기 있던 거 주어다 쓴 거고요.”(윤정)
이윤정은 삐삐밴드와 넘넘의 보컬이자 작사가이며 24년 경력의 스타일리스트이며 예술 전시 작가이고 동시에 워킹맘이다. 밴드활동과는 별개로 이재는 대학교를 다니고 이승혁은 ‘퍼피라디오’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헬’이나 ‘머더’ 같은 포스터는 어디서 나왔냐고요? 부모 입장에서 그것만은 좀… 노코멘트하면 안될까요?”(윤정)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