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문화계 블랙리스트' 김기춘 사건 다시 재판하라"(종합)

"정부 지원 배제 지시는 직권남용 해당…일부 행위 유죄 판단은 법리 오해"

입력 : 2020-01-30 오후 4:21:58
[뉴스토마토 정해훈 기자] 문화예술계 지원 배제 명단인 이른바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기소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직권남용 혐의에 대해 대법원이 일부 행위를 다시 심리하라고 판단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안철상 대법관)는 30일 직권남용 등 혐의로 기소된 김 전 실장 등에 대한 상고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한 원심을 법리오해·심리미진 취지로 파기하는 판결을 선고했다.
 
김 전 실장은 지난 2014년~2015년 박근혜 전 대통령,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과 공모해 문화예술계 지원 배제 명단을 작성한 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영화진흥위원회,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기금 지원 심사 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하고, 1급 공무원 3명을 사직하도록 하는 등 직권남용·강요 혐의로 기소됐다. 또 2016년 12월 국정농단 의혹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허위로 진술하는 등 위증 혐의도 받는다.
 
재판부는 원심과 마찬가지로 "피고인들이 직권남용에 해당하는 지시를 해 예술위, 영진위, 출판진흥원 소속 직원들이 배제 지시 전달, 사업 진행 절차 중단, 상영 불가 통보 등 행위를 하게 한 것은 모두 위원들의 독립성을 침해하고, 자율적인 절차 진행과 운영을 훼손하는 것으로서 예술위 등 직원이 준수해야 하는 법령상 의무에 위배되므로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때'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다만 "원심이 각종 명단을 송부하는 행위, 공모사업 진행 중 수시로 심의 진행 상황을 보고하는 행위 등의 부분도 유죄로 판단한 것은 직권남용의 의무 없는 일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고,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않아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예술위, 영진위, 출판진흥원 소속 직원들이 종전에도 문체부에 업무 협조나 의견 교환 등 차원에서 명단을 송부하고, 사업 진행 상황을 보고했는지, 그 근거는 무엇인지, 이 사건 공소사실에서 의무 없는 일로 특정한 각 명단 송부 행위와 심의 진행 상황 보고 행위가 종전에 한 행위와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등을 살피는 방법으로 법령 등의 위반 여부를 심리해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때에 해당하는지를 판단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지난해 12월16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법에서 열린 '세월호 보고 조작' 허위공문서 작성 등 혐의에 대한 항소심 2회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앞서 1심은 김 전 실장에 대해 예술위, 영진위, 출판진흥원 등 지원에 부당하게 개입한 직권남용 혐의를 일부 유죄, 강요 혐의를 무죄로 판단해 징역 3년을 선고했다. 공무원 사직과 관련한 직권남용과 강요 혐의는 모두 무죄, 위증 혐의는 유죄로 판단했다. 조윤선 전 장관에 대해서는 위증 혐의만을 유죄로 판단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무죄 또는 김 전 실장 등과의 공범 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2심은 공무원 사직과 관련한 직권남용 혐의를 유죄, 출판진흥원 지원에 개입한 직권남용 혐의를 전부 유죄로 판단해 김 전 실장에게 징역 4년을 선고했다. 조 전 장관에 대해서는 1심에서 무죄로 판단했던 직권남용 혐의를 일부 유죄로 인정해 징역 2년을 선고했다. 또 박 전 대통령의 공범 관계도 인정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에서 피고인들은 문화예술계의 특정 개인이나 단체가 정부에 반대하거나 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했거나 특정 이념적·정치적 성향을 가졌다는 이유로 그들에 대한 명단을 문체부를 거쳐 예술위, 영진위, 출판진흥원에 하달해 정부 지원을 배제하도록 지시했다"며 "이러한 피고인들의 행위는 헌법과 관련 법률의 규정 등에 비춰 볼 때 위헌·위법·부당한 행위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그러면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행위는 단순히 '좌파에 대한 지원 축소와 우파에 대한 지원 확대'가 바람직한 정책임을 선언한 것에 그치는 것이라고 보기 어렵고, 국정 최고책임자인 대통령 자신의 직권을 남용한 행위임과 동시에 피고인 김기춘 등의 직권남용 행위에 공모·가공한 것이므로 그에 관한 공모공동정범의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형법 제123조(직권남용)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해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한 때에는 5년 이하의 징역,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직권남용의 기준에 대해서는 그동안 법원마다 판단이 갈렸지만, 이번 대법원 판단은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때'의 의미를 판시해 명확한 직권남용 법리 해석을 제시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문화예술진흥기금 등 정부의 지원을 신청한 개인 또는 단체의 이념적 성향이나 정치적 견해 등을 이유로 예술위 등이 수행한 각종 사업에서 정부의 지원을 배제하도록 지시한 것은 헌법과 법률에 위배돼 직권남용에 해당한다는 원심의 판단을 확정했다"며 "직권남용죄에서 말하는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때'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판시해 직권남용죄의 구성 요건에 대한 법리 해석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이 부분 원심 판단에 관해 일부를 수긍하고 일부를 법리오해·심리미진으로 파기했다"고 말했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등 사건으로 수감 중이던 김기춘 전 청와대 대통령비서실장이 법원의 구속 취소 결정으로 지난해 12월4일 오전 서울 송파구 동부구치소를 나서며 취재진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뉴시스
 
정해훈 기자 ewigjung@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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