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사사건건 뒤집어 놓고/ 지지고 볶고 밀고 당기고/ 물어뜯고 속 끄~읋이고오!”
지난달 31일 저녁 10시경, 서울 마포구 서교동 공연장 프리즘홀. 정확한 성음과 강인한 통성이 펄떡이며 춤을 추자 관객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데뷔 후 독창적인 음색과 창법으로 포크계 나윤선이라는 평을 받아온 싱어송라이터 최고은(36)의 무대. 따스한 기타음에 국악 요소를 버무린 이 ‘한국적 포크’가 흩날리는 순간, 모두의 미소가 만개했다.
영국 ‘글래스톤베리’ 마음을 무려 세 차례(2014년, 2015년, 2019년)나 훔친 그 목소리를 코 앞에서 듣는 자체가 특별했다. “말을 타고 세상 구경 허며”(곡 ‘가야’) 시작한 이 날의 경이적 여정은 몸짓 섞어가며 “어기야 디여차(곡 ‘뱃노래’)” 하는 한 서린 서정으로, 장르적 경계를 허물겠다는 다짐과 분출의 미학으로(곡 ‘Monster’) 곧게 뻗어나갔다. 창이 분사하는 한국 향토 가락과 서양 악기의 화사한 선율의 조합. 이 안에서 포크와 전통, 컨템포러리의 너른 잔향들이 뒤섞여 종횡 무진했다.
그의 음악은 공장에서 찍어낸 것 같은 음악들이 넘실대는 세계와 대척을 이룬다. 자기 경험, 목소리 가득한 생의 울림은 공중 공기를 타고 폐부 깊숙이 들어온다. 어떤 면에서는 거리에서 시작해 거리로 끝나는 음악, 가벼운 숨을 내쉬는 순례자의 유랑 같기도 하다.
이날도 기타와 목소리만으로 빚은 이 신명의 소리에 내면을 비춘 언어들이 공연장을 가득 메웠다. 흡사 항해자의 마음으로 보게 되는 삶과 끝없이 반복되는 사계의 순환, 고향에 관한 토속적 향수, 생의 아름답거나 아픈 기억들. 베이스, 첼로, 퍼커션 등을 동원하던 원곡의 풍성함은 기타와 목소리로 축약됐지만, 그 내면의 소리는 도란도란 말 걸듯 다가왔다. 보온병 생강차를 홀짝이며 하는 공연은 소탈하고 정감 넘치는 분위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신종코로나) 탓에 마음마저 건조한 날이었으나, 마스크 쓴 이들의 두 눈가엔 가느스름한 초승달이 시시때때로 반짝였다.
싱어송라이터 최고은.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이날 그에 앞서 첫 순서로 무대에 오른 천용성은 바디가 뻥 뚫린 사일런트 기타를 45도 각도로 치켜들며 노래했다. 80, 90년대 정서를 두른 그 섬세한 목소리에는, 동물원의 김창기나 어떤날의 조동익이 자주 아른거렸다. 포크와 현대팝, 재지한 접근을 아우르는 앨범의 다양성을 기타 프랫 안에 축약한 이날 공연은 내밀한 가사, 곡의 원형성에 더 집중하게 하는 효과를 낳았다. 건물주와 세입자 분쟁을 다룬 곡 ‘분더바’는 이날 가장 아이러니했던 곡. “분하지 더럽지 바뀌는 건 하나 없지”라는 이 사회 풍자적 가사를 섬세한 연주와 목소리로 덤덤히 부르는 미스매칭이 묘한 신선함을 일으켰다.
천용성에 이어 에몬 역시 이날 어쿠스틱 기타 만을 들고 무대에 섰다. 지난해 정규 2집 ‘네가 없어질 세계’를 발표한 그 역시 현재 대중음악계의 뜨거운 관심을 받는 뮤지션. 이날 그는 어쿠스틱 기타의 통타 만으로도 록킹한 ‘별 세계’를 창조했다. 앰플리파이어를 활용한 소리의 증폭감이 내면 세계로 빚은 가사들을 새로운 시공에서 듣는 환상을 일으켰다.
이날 세 뮤지션의 릴레이 공연은 프리즘홀과 정원석 대중음악평론가가 공동으로 기획했다. ‘프리즘 브레이크(PRISM BREAK)’란 제목에, ‘무경계 음악향유 프로젝트-취향을 갖지 말자!’란 부제를 달았다. 현재 대중음악계에서 핫한 뮤지션들을 엄선, 매회 장르와 스타일을 바꿔 선보이는 시리즈 공연이다. 특정 장르 편중의 오늘날 음악계 현실을 바로 보고 다양한 음악적 경험을 제공하는 데 목표를 뒀다.
“주변에서 좋은 음악을 만들면 저는 오히려 힘을 얻어요.” 마지막 무대를 장식한 최고은은 이날 이 공연의 취지, 음악 연대의 의미를 다시금 일깨워줬다. “마라톤을 보면 페이스메이커가 있잖아요. 음악에 선의의 경쟁이란 게 있다면 그런 것일테지요. 음악으로 대결? 그런 걸 왜 하겠어요.”
에몬(좌)과 천용성.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