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기 회항은 비행기 결함, 기상 악화 같은 비상 상황이 발생했을 때 기장의 판단에 따라 결정된다. 항공기 안에서 최고 결정권자는 기장이다. 국가 정상이 타도 변하지 않는다. 독재자가 아니라면.
우리나라 국적기에서 이런 불문율이 깨진 적이 있다. 너무나 유명한 '땅콩 회항'이다.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은 땅콩, 아니 정확히는 마카다미아의 포장을 승무원이 벗기지 않은 채 서비스했다는 이유로 비행기를 돌렸다.
대한민국 1위 항공사 오너의 큰 딸인 조 전 부사장은 그렇게 '갑질'의 대명사 중 하나가 됐다. 땅콩 회항이 발생했던 2014년 조 전 부사장의 한진칼 지분율은 2%에 불과했지만 여느 권력자도 쉽게 못 할 힘을 과시했다.
이후로도 도덕성을 의심할만한 일들이 몇 번 더 일어났고 조 전 부사장은 쫓겨나듯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비행기를 돌릴 정도로 높았던 위세는 그렇게 한풀 꺾였다.
그 사이 사모펀드 KCGI가 한진칼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오너 일가의 잘못된 경영으로 한진그룹의 주주가치가 훼손되고 있다며 지배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명분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비판의 중심에는 조 전 부사장이 있었다.
그랬던 KCGI가 갑작스레 조 전 부사장의 손을 잡았다. 태도를 바꿔 경영권을 내려와야 한다던 그 주체와 한배를 탄 것이다. 이들의 연대에는 고 조양호 전 한진그룹 회장과 친분이 있다고 알려진 반도건설도 힘을 실었다.
KCGI가 2018년 존재감을 드러냈을 때만 해도 '기업사냥꾼'이라는 시선도 있었지만 '소액주주들의 희망'이라는 평도 나왔다. KCGI의 압박으로 한진칼 재무구조가 개선되면 소액주주들의 이익이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 전 부사장과 손을 잡은 현재 시장의 평가는 차갑다. 주가를 띄우기 위해 명분을 저버렸다는 비판과 함께 정말 주가가 뛰면 언제 손을 털고 나갈지 모른다는 우려만 남았다. 물론 KCGI는 긴 호흡으로 한진그룹 사업의 수익성을 끌어올리고 거기에서 이익을 얻겠다고 한다.
지금 KCGI와 반도건설은 다음 달 주주총회에서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의 연임을 막고 경영권을 가져오기 위해 뛰고 있다. 둘에게 경영권 그 자체가 간절하지는 않다. 그룹 임원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기업가치를 향상시키기 위한 지배력을 키우는 데 필요한 수단일 뿐이다.
3자 연합에서 임원 자리와 경영권이 가장 절실한 것은 조 전 부사장이다. 아주 현실적으로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지분에 대한 상속세를 내기 위해서라도 그렇다. 조 전 부사장은 현재 그룹 내 직책이 없어 고정 소득이 없다고 알려졌다. KCGI가 조 전 부사장의 복귀가 없다고 강조했지만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이유다.
하지만 조 전 부사장 때문에 한진그룹 직원들은 KCGI와 반도건설에까지 완전히 등을 돌렸다. 이렇게 된 이상 소액주주들의 지지도 얻기 쉽지 않다. 조 전 부사장에게 '땅콩 회항'보다 더욱 간절할 '경영 회항' 항로에는 난기류가 가득해 보인다.
김지영 기자 wldud91422@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