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러시아 재발견 24화)어떤 삐오네르 회상기

입력 : 2020-03-09 오전 8:00:00
어느 크리스마스 날 저녁, 낫과 망치와 별이 그려진 소련의 국기가 내려가고 러시아의 삼색 국기가 올라갔다. 지난 세기 인류는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을 경험했지만 그 세기가 저물 무렵 이 첫 실험의 실패도 목격해야 했다.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USSR)이 사라지고 새로운 러시아가 역사에 등장했을 때, 타국의 사람들은 충격과 호기심으로 이 세계사적 사건을 지켜보았고 러시아인들은 혼돈과 기대, 희망과 절망의 시간 속에 던져져 있었다. 강산이 두세 번 바뀔 동안 커다란 변화를 겪어온 러시아인들, 그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삐오네르 궁전의 아이들
 
“여기는 삐오네르 궁전이에요.”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한 여성이 갑자기 끼어든 나에게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선생님인 그녀가 권하는 과자를 집어 먹으면서 아이들이 흥겹게 노는 모습을 보니 나도 덩달아 즐거워졌다. 1993년 1월 새해 연휴에 보았던 이 광경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은 이유는 한편으론 허기에 지친 이방인에게 보여준 열린 마음의 따뜻한 환대가 고마워서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당시의 나에겐 좀 뜻밖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러시아 생활의 첫 일 년은 암울한 인상으로 가득했다. 필요한 식료품이나 생필품이 보일 때는 그 즉시 사야지, 그렇지 않으면 언제 또 그 물건이 나올지 모른다는 걸 배우게 된 시절이었고, 갑자기 들이닥친 자본주의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 특히 옛 소비에트의 영광을 만들었던 노년층의 고단한 모습을 보면서 매일 무거운 마음으로 기숙사에 돌아오곤 했던 터였다. 그런데 이르쿠츠크에서 소련 문화의 일부였던 ‘삐오네르’라는 말을 듣게 되고 즐겁게 노는 어린이들을 보니 나로서는 낯설고 심지어 비현실적인 느낌마저 들었던 것이다.
 
1914~1915년경의 우편엽서에 그려진 러시아의 스카우트. 왼쪽 아래에는 ‘러시아 보이스카우트’, 오른쪽에는 ‘약자를 도울 준비를 하시오’라고 쓰여 있다. 사진/위키미디어 커먼스
 
‘삐오네르’는 ‘개척자’, ‘선구자’, ‘선봉’의 뜻으로, 소련 시절의 ‘소년소녀 선봉대’를 가리킨다. 우리가 가끔 텔레비전에서 보게 되는 빨간 스카프를 맨 북한 어린이들처럼, 사회주의권 국가들은 소련의 삐오네르 조직을 본떠 소년단을 만들었다. 그런데 소련의 삐오네르는 사실 20세기 초 러시아 제국에서 전개된 스카우트 운동에 기반을 두고 있다. 스카우트 운동의 창시자로 알려진 영국의 로버트 베이든-파월 장군은 1907년 첫 스카우트 캠프를 열었는데, 러시아에서는 알레그 판뜌호프 대령이 1909년 스카우트 운동을 시작했다.
 
이 스카우트 운동의 긍정적 측면을 살리고 공산주의 이념에 따른 양육을 실현한 것이 ‘삐오네르 조직’(선봉대)이다. 1922년 러시아 곳곳에 건설되어 있던 삐오네르 분견대들이 ‘스파르타크(스파르타쿠스) 소년 선봉대’라는 어린이 공산주의 단체로 통합되었고, 1924년 레닌이 사망한 후 그의 이름을 따게 된다. 1926년에는 ‘전(全)연방 레닌 선봉대’로 명명되어 1991년까지 존재했다. 소련이 붕괴한 후, 어린이들의 동아리, 클럽, 창의적인 활동들이 있었던 삐오네르 궁전은 몰수되어 ‘어린이·청소년 창의성 센터(궁전)’로 변형된다. 1993년 1월 아직 소련 시절의 흔적을 간직한 채 내 앞에 등장했던 이르쿠츠크의 삐오네르 궁전도 그 이후 많은 변화를 겪었을 듯싶다.
 
1973년 3월 미하일(미샤) 바쥴린. 삐오네르 단복은 보통 행사 때 입고 평소에는 이처럼 교복에 삐오네르 목수건을 맸다고 한다. 사진/미하일 바쥴린
 
밖으로부터의 시선과 안으로부터의 경험
 
소련에서는 9월 1일까지 7세가 된 어린이들이 1학년으로 입학해, 1~3학년 즉 7~9세는 삐오네르의 전(前)단계인 ‘악쨔브료녹’(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 10월에서 따온 말)이 되었다. 보통 4~7학년인 10~13세가 삐오네르 단원인데, 3학년인 9세 때 앞당겨져 삐오네르가 되기도 했다고 러시아 친구 미샤가 전해 준다. 물론, 생일에 따라 나이를 먹으니 조금씩 차이가 생길 수도 있다. 삐오네르 다음에는 ‘꼼소몰’ 즉 ‘전(全)연방 레닌 공산주의 청년동맹’ 단원이 되는데, 8~10학년인 14~16세와 그 이후인 26세까지가 여기에 해당된다.  
 
아마도 매체를 통해 접해 온 북한 소년단의 모습이 뇌리에 남아서겠지만, ‘삐오네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우리는 대부분 부정적인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이를테면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획일화된 집단적 정치 교육을 강요받는 어린이들’ 같은 식이다(사실 우리도 독재 시절에는 그런 교육을 받았었다). ‘분견대’, ‘분대’ 같은 용어에서 느껴지듯이, 일종의 군사조직 같은 이미지도 있다. 그런데 스카우트 운동도 그 용어 자체가 ‘척후병’, ‘정찰병’을 뜻하는 데서 보이듯이 군사적인 성격에서 시작된 것이다. 1899년 당시 대령이었던 베이든-파월이 남아프리카의 제2차 보어 전쟁 중에 현지 소년들을 척후병으로 활용해 전투에서 승리한 데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1973년 3월 미샤의 3학년 학급. 왼쪽 맨 뒷줄, 지구본 앞에 앉은 그와 다른 두 명은 '우등생'이라는 이유로 먼저 삐오네르가 되어 목수건을 매고 있다. 아직 '악쨔브료녹'인 나머지 반 친구들은 4월 말에 모두 삐오네르로 받아들여졌다. 사진/미하일 바쥴린
 
밖에서 바라보는 우리에게 부정적 이미지가 있는 것과는 달리, 옛 소련의 삐오네르 문화를 경험했던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는 그것이 따뜻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우리가 모르는 그 이면에는 무엇이 있을까? 삐오네르에 대한 나의 러시아 친구 스베따의 회상기를 여기에 소개하는 이유는 우리의 의문을 풀어줄 실마리가 엿보여서이다. 물론 개개인의 경험이 다르고 소회도 각각이겠지만, 한 개인의 기록에는 그가 살았던 시대와 사회가 반영되어 있다. 나는 어린 시절 걸스카우트를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원한다고 모두 스카우트 대원이 되지는 못하는 사회에서 자라난 나는 모든 어린이들이 ‘현실사회주의’의 스카우트 대원이 되어야만 했던 체제에서 성장한 친구들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1974년 열 살 때 삐오네르가 된 스베뜰라나(스베따) 샤라뽀바의 모습. 삐오네르의 단복 대신 교복을 입고 삐오네르의 목수건을 매고 있다. 사진/스베뜰라나 샤라뽀바
 
스베따의 삐오네르 이야기
 
“나는 1974년 가을 열 살 때 삐오네르 조직에 들어갔습니다. 나는 당시 부모님과 함께 블라디미르 시에 살았습니다. 블라디미르의 즈다노프 트랙터 공장 ‘문화의 집’에서 입단 기념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구역 내 여러 학교에서 온 수십 명의 어린이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선서를 했고 꼼소몰 단원들이 우리에게 목수건을 매 주었습니다. 나는 기쁨과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블라디미르 시는 모스크바에서 동쪽으로 176km 떨어진 도시로, 스베뜰라나(스베따) 샤라뽀바(결혼 전의 성)는 블라디미르를 구성하는 세 구역(라이온) 중 한 구역에 살았다. 그 당시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10세에서 13세까지의 모든 학생이 삐오네르였는데, 드물게 예외도 있었다고 한다. 스베따의 학급에 있었던 러시아 정교회 사제의 아들 디마가 그런 경우였다. “디마는 자신의 종교적 견해를 숨기지 않았지만 우리에게 그것을 강요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신은 나이 많은 할머니들이 믿는 그런 무엇이었습니다. 디마는 좋은 친구였습니다. 선생님들도 우리도 그에게 잘 대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정교회 신학교에 들어가서 사제가 되었습니다.” 소비에트 시절 종교에 대한 시사점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삐오네르 조직은 많은 분견대들로 구성되었고 각 분견대는 평의회(소비에트)를 운영했다. 삐오네르의 조직·운영 체계는 학교를 기반으로 돌아갔다. 각 분견대에는 꼼소몰 단원이 지도원으로 참여했는데, 스베따는 43년 전 자신이 7학년일 때 지도원이었던 꼼소몰 단원의 이름과 직업도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의 지도원은 트랙터 공장에서 온 꼼소몰 단원 발로쟈였습니다. 그는 우리보다 5살 위였고 공장에서 금속조립노동자로 일했습니다.” 노동자와 학생들 간의 결합이 이뤄졌던 것을 알 수 있다.
 
레닌의 얼굴이 묘사된 삐오네르 배지로 미샤와 스베따의 가슴에도 달려 있다. 별 위에는 세 개의 불꽃이 보이고 아래에는 '늘 준비되어 있습니다!'라는 좌우명이 쓰여 있다. 사진/위키미디어 커먼스
 
삐오네르 시절에 했던 많은 활동들 중 그녀가 유쾌하게 기억하는 사건이 있다. “우리는 정기적으로 폐지와 고철을 수집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불필요한 신문과 책, 쇠붙이들을 찾아 무리를 지어 도시의 여러 기관들을 돌아다니고 아파트들의 벨을 눌렀습니다. 한번은 우리들이, 개미들처럼, 반쯤 해체된 자동차를 거머잡고 거의 고철수집소까지 끌어갔는데, 입구에서 자동차 주인이 뛰어나와 우리를 몰아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웃었는지, 자동차 주인에게도 웃긴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종이를 만들고 새로운 금속을 녹이기 위해 폐지와 고철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사들에서 우리를 끌어당겼던 주된 것은 우리가 함께이고 정다웠으며 우리 반이 학교에서 폐지나 고철 수집으로 일등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지도원인 꼼소몰 청년 발로쟈와 함께 7학년 스베따네 삐오네르 분견대는 삐오네르의 지역 경기인 ‘분견대 더하기 지도원’에 참가한다. 학년 내내 그들은 흥미롭고 유용한 것들, 그들에게 있었던 일들에 대해 쓴 일지를 만들었다. 회의를 열었고 고철과 폐지를 수집했다. 지도원과 캠핑을 하고 트랙터 공장으로 견학을 갔으며 쏩호즈(국영집단농장)에서 당근 수확을 도왔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일지에 쓰고 그렸습니다. 그리고 학년 말에 우리 분견대는 승자들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아를료녹’이 주어졌다!
 
1978년 갓 꼼소몰 단원이 된 스베뜰라나 샤라뽀바가 삐오네르 깃발 앞에 서 있는 모습. 그녀는 삐오네르 분견대의 흰 셔츠를 입고 있다. 그녀의 뒤에 '소비에트 연방 삐오네르 조직, 준비하시오'라고 쓰인 글귀가 보인다. 사진/스베뜰라나 샤라뽀바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percepti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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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익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