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밴드신의 ‘찬란한 광휘’를 위해 한결같이 앨범을 만들고, 공연을 하고,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TV, 차트를 가득 메우는 음악 포화에 그들은 묻혀지고, 사라진다. ‘죽어버린 밴드의 시대’라는 한 록 밴드 보컬의 넋두리처럼, 오늘날 한국 음악계는 실험성과 다양성이 소멸해 버린 지 오래다. ‘권익도의 밴드유랑’ 코너에서는 이런 슬픈 상황에서도 ‘밝게 빛나는’ 뮤지션들을 유랑자의 마음으로 산책하듯 살펴본다. (편집자 주)
영국 런던에서 서쪽으로 대략 168km(105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리얼 월드 스튜디오’가 있어. 코츠월드, 옥스퍼드와 통상 ‘런던 근교’라 통칭되는 바스, 그 인근 맞아.
56평 남짓(2000스퀘어피트)한 이 공간은 세계적인 음악가들의 ‘녹음(錄音) 성지’야. 폴 사이먼, 뷔욕, 콜드플레이, 멈포드앤선즈, 카니예 웨스트, 시아, 에이미 와인하우스…. 웬만한 거물급 현대 음악가들에게는 꼭 거쳐야 할 메카가 된지 오래지.
일단 설립자부터가 록, 팝계의 입지전적 인물이잖아. 밴드 제네시스의 보컬이었던 피터 가브리엘(70). 록에 오페라를 섞어 본격 프로그레시브록 시대를 연 주축이지. 간디 사상에 매료되고부터는 자연주의자의 길도 걸었어. 1986년 녹음(綠陰)과 강물로 뒤덮인 여기를 스튜디오 부지로 점찍은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야.
영국 런던 근교의 바스 인근 '리얼 월드 스튜디오'에서의 혁오. 사진/두루두루아티스트컴퍼니
한국 밴드가 이 가브리엘의 ‘음악 성채’에 갔다는 소식에 참 벅찼어. 섬 같은 그 곳에서 그들은 어떤 실존주의적 질문 같은 걸 떠올렸을까. 아님 초현실적 음악 세계의 상상 내지 자유를 발현했을까. 여기서 3주간 머물며 “치열했다”는 그들을 탐험하고 싶었어. 그래, 내 질문에 직접 답해준 밴드 혁오[오혁(리더, 보컬, 기타), 임동건(베이스), 임현제(기타), 이인우(드럼)]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이 편지에 적어 볼게.
새 앨범 ‘사랑으로’는 전작들과 분리해서 볼 필요가 있어. 20, 22, 23, 24로 이어지던 기존 앨범 제목의 서사성부터 탈피했지. 이들이 바라보는 삶의 방식, 음악적 아이디어가 달라진 영향이야. 억지스러운 것을 버리고 자연스러운 것에 집중하겠다는 마음. 미리 정해둔 목표적 지향보다 다분히 과정지향적인 제작 방식. 이렇게 변화한 관점, 행동이 자연스럽게 ‘음악적 다름’을 만들었어. 일러스트 대신 독일 사진작가 볼프강 틸만스 사진을 표지에 걸어둔 것도 큰 변화야. 뉘어졌지만 살아있는 풀을 보며 “상반된 양면이 공존하며 끝없이 순환하는 인상을 받았는데, 그게 꼭 덧없이 지나가고 잊혀지는 세상 속 대안, 사랑(오혁)” 같았대.
제목에 숫자를 넣는 대신 총 러닝타임을 26분, 26초로 끊은 점도 이번 앨범의 특이점이야. 근데 이건 자신들 나이를 제목으로 짓던 전 작업물들과는 성격이 조금 달라. 오혁 말에 의하면 이번엔 그냥 ‘재미적 요소’였대.
영국 런던 근교의 바스 인근 '리얼 월드 스튜디오'에서의 혁오. 사진/두루두루아티스트컴퍼니
혁오는 리얼 월드 스튜디오에서 3주 가량의 시간을 보냈어.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꼬박 악기 녹음을 했다는군. 좋은 컨디션의 빈티지 프리 앰프와 마이크, 콘솔…. 장비 이해도가 높은 테크니션들과 ‘음악 합숙’을 하며 사운드를 매만졌어. “환경이 다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행동도, 생각도 달라졌”고(동건) “아이디어를 던지면 함께 고민하고 풀어가는(현제)” 식으로 흘러갔대. 보사노바, 사이키델릭, 슈게이징이 한 데 뒤섞인 이번 음반은 여전한 혁오식 ‘장르 혼재’야.
사운드적으로 모든 수록곡에 공통 적용된 건 ‘불필요한 요소의 지양’. 밴드는 ‘큰 의미를 갖지 않거나 최신 유행하는 소리를 쫓아 녹음하는 것들’을 배제시켰어. 그건 “노래를 만들 당시 자연스러운 생각 이외의 것들, 부차적인 소리(동건)”였기 때문이래.
영국 런던 근교의 바스 인근 '리얼 월드 스튜디오'에서의 혁오. 사진/두루두루아티스트컴퍼니
사랑에 관한 앨범이지만 가사에 ‘사랑’이란 단어가 자주 등장하지는 않아. 그보다는 빛과 어둠 같은 단어들이 자주 오르내리지. 사랑 무(無)의 현실(‘어둠’), 그럼에도 결국 사랑을 찾는 인간(‘빛’)에 관한 은유 같아.
라이너노트에서 이들은 사랑을 ‘일상의 실천’이란 말로 정의해. 사랑은 차별과 혐오, 고정된 우위, 세대 갈등, 환경파괴가 들끓는 이 세계의 기형성을 최소한이나마 줄이려는 시도이자 노력으로 존재하지. 코로나로 사랑, 연대의 기억이 희미해져가는 오늘날 이보다 더 따뜻한 말이 어딨어.
“사랑에 관한 단서들을 이 앨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냐”는 질문은 그래서 어리석었어. 오혁은 “사랑은 앨범에서 찾기 보다는 결국 각자의 삶속에서 찾아야한다”더라. 이 앨범은 “그저 (사랑을 찾아가는) 삶 속에서 필요한 만큼” 충분히 이용해 달래.
영국 런던 근교의 바스 인근 '리얼 월드 스튜디오'에서의 혁오. 사진/두루두루아티스트컴퍼니
지난달 중순, 공연장에서 본 곡 ‘New Born’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어. 8분46초에 달하는 이 대곡의 압도적인 서사는 명멸하는 하얀 조명에 섞여 우주 황홀경 같은 풍광을 만들었거든.
곡 중반부까지 거친 질감의 기타 사운드가 리드하던 곡은 웅얼거리는 영어가사와 비행장 굉음 같은 소리의 합으로 이어졌어. 이 곡을 쓰고 녹음하면서 오혁은 “많은 순간들이 스쳐지나가고 그걸 편하게 관조하는 느낌을 받았다” 더라. 다른 수록곡과 결이 다른 이 곡은 다음 앨범 방향을 여는 힌트기도 해. 이런 느낌의 곡들을 북유럽 같은 국가에서 써볼 생각은 없을까. 오혁은 “(다음 앨범은) 기회가 되면 (특정하지 않은) 어떤 도시 한 곳에 머물며 작업을 해보고 싶다”고 해.
영국 런던 근교의 바스 인근 '리얼 월드 스튜디오'에서의 혁오. 사진/두루두루아티스트컴퍼니
지난해 미국 코첼라 무대에 선 밴드는 올해 월드투어로 세계적 도약을 준비 중이야. 코로나 여파로 일정은 잠시 미뤄진 상태지만 상황을 봐가며 파리(4월14일)를 시작으로 유럽과 북미, 아시아 일정을 다시 재개할 예정이래. 이들 음악과 문화, 패션에 담긴 동양, 서양 공존의 ‘범세계주의’가 하루 빨리 세계로 뻗어가길 바라고 있어.
멤버들에게 이런 바람을 전하니 “(공연이든, 음악이든) 작업물들에서 ‘범세계주의’가 좋은 밸런스로 잘 섞여있으면 좋겠다(오혁)”는 생각을 늘 하곤 한대. 밴드는 최근 대면 접촉이 없는 무관객 방송 공연, 예능 ‘놀면 뭐하니?’의 ‘방구석 콘서트’ 준비로 바쁘더라.
영국 런던 근교의 바스 인근 '리얼 월드 스튜디오'에서의 혁오. 사진/두루두루아티스트컴퍼니
마지막으로 이번 앨범을 여행지에 빗대본다면 어떤 여행지일까, 멤버들에게 물었어.
“어디든 사랑을 부추기는 도시, 서울 같은 곳(오혁)”
“한국 사람들이 영국과 독일에서 작업했기에, 저에게 이 앨범은 영국과 한국과 독일의 모습이 섞인 곳입니다.(현제)”
“이번 앨범을 듣고 있으면 주황색과 분홍색이 떠오릅니다. 따뜻한 햇빛이 있는 바닷가 모래 사장에서 편하게 쉬고 있는 느낌입니다.(동건)”
혁오가 답변 내내 말해준 ‘사랑’은 은하계 깊은 곳에서 점멸하는 신호 같았습니다. 둥글둥글하고 따뜻한 느낌의 음악 편지를 받은 느낌. 그래서 이번 화는 17일 밴드 혁오에게서 받은 서면 인터뷰를 편지 형식의 글로 재구성해 보았습니다. 코로나로 시끌시끌한 이 날들에, ‘사랑으로’.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