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러시아 재발견 27화)시베리아가 품은 사람들

입력 : 2020-03-30 오전 6:00:00
어느 크리스마스 날 저녁, 낫과 망치와 별이 그려진 소련의 국기가 내려가고 러시아의 삼색 국기가 올라갔다. 지난 세기 인류는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을 경험했지만 그 세기가 저물 무렵 이 첫 실험의 실패도 목격해야 했다.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USSR)이 사라지고 새로운 러시아가 역사에 등장했을 때, 타국의 사람들은 충격과 호기심으로 이 세계사적 사건을 지켜보았고 러시아인들은 혼돈과 기대, 희망과 절망의 시간 속에 던져져 있었다. 강산이 두세 번 바뀔 동안 커다란 변화를 겪어온 러시아인들, 그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시베리아의 작가 밤필로프와 아버지의 예지몽
 
부랴트와 러시아 양쪽의 피를 받았으나 자신을 부랴트인이라 생각한다던 여행가이드가 떠난 후, 나는 그녀가 언급했던 소설가 발렌찐 라스뿌찐의 얘기를 한 번 더 듣게 됐다. 하바롭스크에서 온 류드밀라 체르니쇼바 씨는 이르쿠츠크 주 출신인 이 소설가의 애독자로, 그의 삶에 대해 열심히 설명해 준다. 그리고 역시 이르쿠츠크 주 출신인 희곡 작가 알렉산드르 밤필로프(1937~1972)가 라스뿌진과 함께 이르쿠츠크 국립대 어문학부에서 동문수학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혹시 문학을 전공하셨나요?” 그녀의 해박한 지식에 내가 물었다. “저는 수학과 물리를 가르치는 교사입니다.” 그녀가 싱긋 웃으며 대답한다.
 
우리나라에선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밤필로프는 현대 러시아 연극을 대표하는 극작가로 러시아인들로부터 체홉에 버금가는 사랑을 받고 있다. 부랴트족 출신인 그의 아버지 발렌찐 니끼찌치는 학교 교장이자 러시아어·문학 교사였고 슬라브족 러시아인인 어머니 아나스따씨야는 수학 교사였는데, 부계 쪽 조상은 몇 세대가 부랴트 라마승들이었고 모계 쪽 남성들은 러시아 정교의 사제들이었다고 한다(동방 정교의 사제는 결혼 가능). 이 미래 작가의 아버지는 아들이 태어날 것을 예견하면서 아내에게 흥미로운 쪽지를 남긴다.
 
알렉산드르 밤필로프 (출처: 이르쿠츠크 주 국립문화자치기관 ‘알렉산드르 밤필로프 문화 센터’ 홈페이지)
 
“나는 그 애가 작가가 되지 않을까봐 걱정이오. 꿈에서 온통 작가들을 봤기 때문이오.” 그는 꿈속에서 레프 톨스토이와 산탄(散彈)을 찾고 막심 고리끼와 보드카를 마시며 그의 뺨에 뽀뽀를 했다면서 다시 한 번 “작가가 태어나지 않을까봐 걱정이오...”라고 쓰고 있다. 그리고 아들이 태어나자 그는 또 다음과 같이 썼다. “내 예감이 들어맞았소... 아들. 그것이 두 번째도 적중시키는 건 아니지만... 그 애를 레프나 알렉세이(고리끼의 본명)로 부르면 어떻겠소? 알다시피 내게는 예지몽이 있다오.”
 
푸쉬킨이 죽은 지 백 년째 되던 해에 태어난 아들은 톨스토이나 고리끼가 아닌 푸쉬킨의 이름을 따 알렉산드르가 됐고 작가가 될 거라는 아버지의 두 번째 예감도 실현됐다. 하지만 그 아들이 한 살 되던 해에 아버지는 밀고를 당해 ‘범(汎)몽골주의’라는 죄명으로 총살당하고 만다. 아들의 설명에 따르면, “시골 교사로는 너무 많은 책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예지몽과 함께 태어난 이 탁월한 극작가는 35세 생일을 이틀 앞두고 자신이 사랑하던 바이칼에서 익사한다. 요절한 푸쉬킨처럼 그의 삶도 너무나 짧았다.
 
예지몽을 꾼 아버지 발렌찐 니끼찌치. (출처: 이르쿠츠크 주 국립문화자치기관 ‘알렉산드르 밤필로프 문화 센터’ 홈페이지)
 
이르쿠츠크를 거쳐 간 조선의 독립운동가들
 
이르쿠츠크 시의 레닌거리 23번지에는 현재 ‘밤필로프 청소년 극장’이 위치해 있다. 1987년 밤필로프의 이름이 붙여진 이 극장은 1928년에 설립된 유서 깊은 극장으로, 13번지에 있던 기존 건물이 2006년에 재건축을 위해 폐쇄되면서 이리로 옮겨온 것이다. 그런데 이 건물은 러시아에게도 우리에게도 의미가 큰 역사적 공간이다. 1799년 이래 이르쿠츠크에는 상인, 관료, 장교의 가족들이 모여 카드놀이나 무도회를 즐기는 ‘고귀한 모임’이 간간이 열려 왔다. 그런데 그 명칭이 1887년 ‘공회’(公會)로 바뀌었고 1890년~1891년 이를 위한 건물이 세워진다. 완성된 건물은 연극 공연, 음악회, 시낭송, 자선 행사 등이 열리는 이르쿠츠크의 문화 센터가 됐고 이후 공간도 더욱 확장되었다.
 
밤에 우연히 마주친 시베리아의 극작가 알렉산드르 밤필로프의 동상. 사진/필자 제공
 
1917년 혁명의 해에 이 건물은 정치적인 행사들이 열리는 곳이었다. 도시의 권력이 볼셰비키로 이전되는 것에 대해 토론이 일어났고, 건물 바로 근처에서 볼셰비키 지지자들과 사관학교 생도들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시베리아 내전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이 건물은 1920년 초 이르쿠츠크에 소비에트 권력이 세워지면서 ‘공회’에서 ‘인민의 집’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이때 러시아 볼셰비키당의 한인 지부인 이르쿠츠크 공산당 고려부(9월에 고려공산당 중앙총회로 개칭)가 결성되고 이듬해인 1921년 5월 바로 이 ‘인민의 집’에서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 창당대회가 개최된다. 며칠 후 상해에서도 이동휘의 주도 하에 한인사회당(1918년 하바롭스크에서 결성)을 모체로 상하이 고려공산당이 창당됐다. 식민지 조국의 해방을 위해 똑같이 지난한 투쟁을 해 왔던 조선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이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로 갈라져 갈등을 겪다가 급기야는 소련 적군의 개입으로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이라는 비극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르쿠츠크 주의 밤필로프 청소년 극장. 무기한 임시 거처라 '지부(필리알)'라고 쓰여 있다. 1921년 5월 이 건물에서 고려공산당 창당대회가 개최되었다. 사진/필자 제공
 
시베리아의 북풍한설을 맞으며 싸우던 독립운동가들의 여러 풍경 속에는 1922년 1월 21일부터 모스크바에서 열릴 ‘원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이르쿠츠크에 속속 모여 들던 모습도 있다. 원래 1921년 가을 이르쿠츠크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다가 모스크바로 바뀐 이 대회에는 독립운동가 50여 명이 참석했는데, 여운형, 김규식, 박헌영, 김단야가 자동차와 마차, 기차를 갈아타면서 중국에서 몽골로, 몽골에서 러시아로 대장정을 이어갔다고 전해진다.
 
데카브리스트의 실패한 봉기와 성공한 문화
 
트루베츠코이의 아내와 세 자녀의 무덤이 있는 즈나멘스키 수도원에서 트루베츠코이의 집-박물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1825년 12월 26일 3천여 명의 군인들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상원광장에 집결했을 때 지휘관인 세르게이 트루베츠코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정쩡하게 진행된 봉기는 무자비하게 진압되어 수백 명이 사망하고 또 수백 명이 체포돼 처벌을 받았다. 트루베츠코이가 나타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지만, 그는 사형을 면하고 동료들과 함께 시베리아의 네르친스크 광산에서 족쇄를 찬 채 강제 노역에 시달리는 혹독한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데카브리스트 세르게이 트루베츠코이의 집(1854~1856 추정, 이르쿠츠크). 2011년에 복원되었다. 그의 아내 예카테리나는 이 집에서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사진/필자 제공
 
시베리아 유배형을 받은 데카브리스트들 중 기혼자는 소수로 21명이었는데, 이들 중 11명의 아내(또는 미래의 아내)들이 시베리아로 따라갔다. 그들은 황제의 법령에 따라 이혼을 할 수 있었지만 이를 거부한다. 대신, 귀족의 지위와 특권, 재산을 포기하고, 유배지에서 태어나는 자녀가 농노의 신분이 되는 것도 감수하면서 추방당하는 쪽을 택했다. 시베리아로 간 그녀들은 헌신적으로 남편들을 뒷바라지하면서 겸손한 태도로 현지의 농민들과 어울리고 공동체의 삶을 꾸려나갔다. 데카브리스트의 아내들은 농민의 자녀들에게 글을 가르쳤고 농민 여성들은 이 귀족 여성들에게 요리와 집안일 하는 법을 가르쳤다.
 
1829년 광산에 있던 데카브리스트 죄수들은 뻬트롭스키 공장으로 옮겨지는데, 감옥에 각각 방이 주어져 아내들과 재결합을 하고 이후에는 정착촌으로 이송돼 살게 된다. 트루베츠코이는 1839년에 강제 노동을 마치고 이르쿠츠크 주의 아요크 마을에 정착했다. 그의 아내 예카테리나는 가장 먼저 남편을 찾아 시베리아로 갔지만, 마차를 타고 여러 달 걸려 도착한 이르쿠츠크에서 다시 네르친스크의 광산으로 가기까지 해를 넘기며 여행 허가를 기다려야 했다. 처음에 족쇄를 찬 남편의 모습을 보고 기절했다는 그녀는 유배지에서 첫 아이를 얻었고, 아기 때 사망한 세 자녀 외에도 여러 자녀들을 두었다. 늘 어려운 농민들을 도와 칭송을 받던 그녀는 그러나 1854년 이르쿠츠크에 짓는 집이 완성되기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트루베츠코이 집-박물관에 전시된 11명의 데카브리스트 부인들. 위에서부터 첫째 줄 왼쪽이 예카테리나 트루베츠카야, 오른쪽이 마리야 발콘스카야, 둘째 줄 제일 오른쪽이 까밀라 이바셰바이다. 사진/필자 제공
 
1856년 사면령이 내려졌을 때 11명 중 예카테리나 트루베츠카야를 비롯한 3명은 시베리아에 묻혀서 돌아오지 못했다. 남은 8명 중 남편과 함께 살아 돌아온 부인들은 마리야 발콘스카야를 포함한 5명이었다. 돌아오지 못한 3명 중에 프랑스인인 까밀라 이바셰바도 있다. 그녀는 1831년 연인인 바실리 이바셰프를 찾아가 시베리아에서 결혼하고 감옥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한다. 자녀들을 낳고 유배지에서도 행복해하던 그녀는 1839년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감하고 그녀의 남편도 일 년 후 그 뒤를 따르게 된다.
 
트루베츠코이 집-박물관에 전시된 세르게이 트루베츠코이의 1860년도 사진(사진: 레비쯔키)
 
중노동형에서 석방된 데카브리스트들의 대다수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시베리아에 남아 농민과 원주민을 위한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학문을 꽃피웠다. 혁명은 실패했지만 시베리아에 새로운 문화를 심은 데카브리스트의 이야기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발콘스키를 외가 쪽 친척으로 둔 레프 톨스토이의 대작 <전쟁과 평화>의 모티프가 됐다.
 
트루베츠코이 집-박물관을 관람하는 사람들. 사진/필자 제공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perceptio@hanmail.net)
 
<뉴스토마토>의 지면 축소 관계로 ‘박성현의 러시아 재발견’은 당분간 연재를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추후 예카테린부르크, 모스크바, 뚤라, 야쓰나야 빨랴나 지역에 관한 글들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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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익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