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정해훈 기자] 미성년이었던 당시 성폭행 혐의로 구속돼 수사를 받다가 검찰 수사 단계에서 혐의없음으로 풀려난 피의자들이 경찰이 진술 증거를 조작했다면서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해 최종 승소했다. 피의자신문조서 작성 과정에서의 직무상 위반에 대해 대법원이 손해배상을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대법원 2부(주심 박상옥 대법관)는 29일 김모씨 등 10명이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에게 100만~3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김씨 등은 만 14~17세의 청소년이었던 지난 2010년 당시 18세였던 지적 장애인 A양을 성폭행하고 강제로 추행한 혐의로 경찰의 조사를 받았다. 이 중 일부는 구속 상태에서 수사를 받았다. 이후 검찰은 이들을 기소 의견으로 송치받아 수사하던 중 피의자들과 피해자 모두 진술을 번복하자 구속 피의자를 석방해 수사했고, 결국 피의자 모두에 대해 혐의없음 처분했다. 이에 김씨 등은 경찰이 진술 증거 조작을 비롯해 수사 과정 전반에서 적법 절차 준수와 수사 원칙을 위반했다며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특히 실제 심문 내용은 범행 일시, 범행 장소, 범행 전 행적, 범행을 공모하고 준비하게 된 과정과 내용, 범행의 세부 내용 등에 관한 경찰의 질문에 대해 단답형으로 한 대답이 대다수인데도 문답의 내용을 바꿔 기재해 마치 피의자로부터 자발적으로 구체적인 진술이 나오게 된 것처럼 조서가 작성됐던 것으로 조사됐다. 이렇게 작성된 피의자신문조서는 영장심사 단계에서 법원에 범죄사실 소명자료로 제출됐고, 검찰 수사 과정에서도 활용됐다.
1심과 2심은 김씨 등의 청구를 일부 인용해 100만원~300만원을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는 원고들에게 조서 작성 과정에서의 직무상 과실에 따른 정신적 고통에 대한 배상으로 위자료를 일부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판결했다.
이에 대해 "영상녹취록과 피의자신문조서를 면밀하게 비교해 보면 수사기관이 고의로 원고들의 진술을 조작했다거나 범죄 혐의를 가지고 구속영장을 청구해 수사한 데에 과실이 있다고 볼 수는 없고, 그 밖에 적법 절차를 위반했다고 보기도 어렵다"면서도 "다만 사법경찰관이 제1회 피의자신문조서 작성 과정에서 장문단답의 실제 신문 내용을 단문장답으로 바꿔 기재한 것은 조서의 객관성을 유지하지 못한 직무상 과실에 해당하고, 이 조서는 이후 영장심사 단계와 검찰 수사 과정에서 원고들의 피의자로서의 방어권 행사에 불이익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수사기관이 원고들에 대한 범죄 혐의를 가지고 이들을 구속해 상당 기간 수사하게 된 데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으므로 변호인 선임 비용이 수사 과정상 과실로 인한 불법 행위로 인해 직접적으로 입게 된 손해라고 보기 어렵다"며 "다만 수사 과정상 진술조서 작성에서 직무상 과실로 인해 원고들이 정신적인 고통을 받았을 것임은 인정할 수 있으므로 과실의 내용과 정도, 원고들의 구속 당시의 나이, 구금 기간과 이들이 제약받은 피의자방어권의 정도 등을 종합하면 위자료 액수는 100만~300만원으로 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인정된다"고 밝혔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번 판결에 대해 "경찰관이 범죄 수사 등 직무를 수행할 때에 국민의 인권을 존중하고 공정해야 하며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법규상 또는 조리상의 의무가 있다는 종전의 법리를 재차 확인했다"며 "특히 성폭력 범죄의 피의자가 소년 등 사회적 약자인 경우 수사 과정에서 방어권 행사에 불이익이 발생하지 않도록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하면서 더 세심하게 배려할 직무상 의무가 있고, 이를 위반한 경우 국가 배상 책임이 발생하는 것을 명확히 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 대법원판결은 수사기관의 피의자신문조서 작성에서 직무상 의무 위반과 관련해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사실상 최초의 선례"라고 덧붙였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 대법원 전경. 사진/뉴스토마토
정해훈 기자 ewigjung@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