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기철 기자] 의료인 아닌 자가 의사 명의를 빌려 개설한 이른바 '사무장 병원'의 사업주는 사무장이기 때문에, 근로자들의 임금과 퇴직금 지급 의무는 병원장 아닌 사무장에게 있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법률구조공단은 최근 폐업한 A병원 근로자들을 대리해 이 병원 사무장 정모씨를 상대로 낸 임금 청구소송에서 최종 승소확정을 받았다고 21일 밝혔다.
공단에 따르면, 제약회사 근무 경력이 있는 정씨는 2014년 충남 서천군에 있는 한 건물을 아내 명의로 매입해 평소 알고 지내던 이모씨 등 의사 2명을 고용해 이씨 명의로 병원을 개업했다. 간호사 등 병원 직원들명도 이씨와 근로계약을 맺었다. 정씨는 총괄이사라는 직함으로 이씨의 도장을 소지한 채 실질적으로 병원을 운영했다.
그러나 1년여만에 경영난으로 병원이 폐업하면서 병원 건물마저 경매로 넘어갔고 직원들은 임금과 퇴직금을 받지 못한 채 직장을 잃었다. 직원 중 16명이 떼인 임금 등 5000만원을 받아달라며 공단에 요청했다.
대법원 법정. 사진/대법원
1, 2심은 병원 직원들의 청구를 기각했다. '사무장 병원' 개설은 의료법 위반이기 때문에 병원과 관련된 수익과 채무 등은 모두 병원장 이씨에게 귀속되고, 근로자에 대한 임금 등 지급 의무도 이씨에게 책임이 있다고 본 것이다.
반면, 형사 재판부는 이와 상반된 결론을 내렸다. 1심은 병원을 실질적으로 경영한 정씨에게 임금 등 지급 의무가 있다고 보고 근로기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정씨의 유죄를 인정한 다음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함께 기소된 병원장은 피고용자에 불과하다고 보고 무죄를 선고했다. 이 판결은 항소나 상고 없이 그대로 확정됐다.
대법원 1부(주심 이기택 대법관)는 근로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근로자들이 형식적으로는 병원장과 근로계약을 체결했지만, 피고가 병원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면서 근로자들을 직접 채용한 점, 직접적으로 업무를 지휘·감독하면서 직접 급여를 지급한 점 등을 고려하면 원고들과 피고 사이에 실질적 근로관계가 성립된 것이고, 피고가 원고 등에 대한 임금 및 퇴직금 지급의무를 부담한다"고 판시했다.
이어 "원고 등과의 근로계약에 따른 임금 및 퇴직금 지급의무는 처음부터 피고에게 귀속된다"면서 "이는 병원의 운영과 손익을 피고에게 귀속시키기로 하는 병원장과 피고 사이의 약정에 따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약정이 의료법 위반으로 무효가 된다고 해도 피고가 원고 등에 대해 임금 및 퇴직금 지급의무를 부담하는 데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고 지적했다.
근로자들을 대리해 이번 소송을 수행한 공단 소속 박왕규 변호사는 "그동안 사무장 병원이 폐쇄된 경우에는 사무장이 병원장에게 임금지급 의무를 미루고 잠적하는 사례가 많았다"며 "이번 대법원 판결로 사무장에게 임금 및 퇴직금 지급 책임이 인정돼 근로자들을 두텁게 보호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최기철 기자 lawch@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