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밴드신의 ‘찬란한 광휘’를 위해 한결같이 앨범을 만들고, 공연을 하고,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TV, 차트를 가득 메우는 음악 포화에 그들은 묻혀지고, 사라진다. ‘죽어버린 밴드의 시대’라는 한 록 밴드 보컬의 넋두리처럼, 오늘날 한국 음악계는 실험성과 다양성이 소멸해 버린 지 오래다. ‘권익도의 밴드유랑’ 코너에서는 이런 슬픈 상황에서도 ‘밝게 빛나는’ 뮤지션들을 유랑자의 마음으로 산책하듯 살펴본다. (편집자 주)
싱어송라이터 오소영. 사진/애프터눈레코드
21일 서울 마포구 연남동 한 건물 3층에 위치한 ‘애프터눈레코드’ 스튜디오. 어깨까지 오는 밝은 색 머리의 싱어송라이터 오소영(47)을 그 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1994년 ‘제 6회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동상 수상자, 고 조동진(1947~2017) 사단 ‘하나음악(이후 2000년대 푸른곰팡이, 현 최소우주로 사명 변경)’의 마지막 젊은 피, 곱고 담백한 목소리와 아련한 기타 연주로 양희은, 장필순으로 이어지는 여성 싱어송라이터 계보를 잇고 있는 뮤지션.
오소영은 긴 호흡으로 음악을 내는 뮤지션이다. 1집에서 2집이 나오기까지 8년이 걸렸고 이번엔 11년이다. 24일 3집 ‘어디로 가나요’를 발표했다. 인터뷰에 앞서 ‘이번 앨범을 잘 표현해줄 수 있는 장소’를 제안하자 그는 망설임 없이 이 스튜디오가 좋겠다고 했다.
지난해 11월부터 이 곳에선 그의 메인 악기인 기타, 보컬의 녹음 과정이 6개월여간 진행됐다. 주로 막차 직전, 어떤 곡의 경우는 밤샘 뒤 새벽까지 기타 녹음만 100차례 가까이 진행한 경우도 있었다. 유재하음악경연대회 출신 후배이자 애프터눈레코드 대표 박경환(재주소년)이 프로듀서로 함께 했다.
싱어송라이터 오소영. 사진/애프터눈레코드
11년 간 그는 이전의 자신을 지우고 다시 그렸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생각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20대 때보다 타인의 의견을 수용하는 유연성도 많이 생겼다.
반대로 악상은 주로 내면에 천착하기보단 외부 세계의 삶을 둘러보는 과정에서 나왔다. 그것은 다시 자신에게로 번지는 이입(移入)이었다. 어느날 TV 다큐에서 본 ‘죽음’이란 화두에 착안했다. ‘누구나 죽을 만큼 힘들다. 그럴 때 용기를 내본다면?’ 죽음을 거슬러 살아가는 삶. 사랑도, 즐거움도 때때로 고개를 드는 삶.
슬픈 듯 밝은 밴드 사운드로 시작되는 앨범은 곧 일부 곡들에서 트로트, 아이리시 폴카 리듬 같은 신명으로 변주된다. “처음 구상보다는 많이 밝아졌어요.” 일순간 행복과 불행은 종이 한 장 차이, 삶의 희로애락은 순간의 신기루 같은 것들이 돼 버린다.
오소영 3집 ‘어디로 가나요’. 사진/애프터눈레코드
첫 곡 ‘홀가분’의 시적 화자는 “무겁게 짓누르던 기억들”로부터 “안녕”을 건넨다. “붙들고 있던 꿈들과 놓을 수 없던 희망에 작별하고 어차피 우린 죽음을 향해간다”고 고뇌하는 이야기다. 노랫말은 3분간 무심한 듯 맑은 오소영의 목소리, 슬픈 듯 밝은 기타의 스트로크와 끊임없이 마찰음을 낸다.
하모니카(권병호)가 진두하는 2번째 곡 ‘살아 있었다’ 역시 마찬가지다. “이미 삶을 놓아버린 누군가는 어쩌면 더 살고 싶은 이들이 아닐까”란 고뇌로부터 나온 곡. 깊고 직설적인 오소영식 노랫말은 발랄하고 경쾌한 하모니카, 포크 리듬과 대립하며 조화를 찾아가는 구도를 계속해 이어간다.
앨범의 3번째 곡이자 타이틀곡인 ‘멍멍멍’은 앨범 일대의 변곡점이다. 아이리시 휘슬(권병호)이 주도 하는 가을바람 같은 사운드는 가벼운 마음의 심상들을 형형색색의 풍선처럼 흩날린다. 맛있는 것을 함께 먹고 따뜻하게 안아주는 동화체의 풍경이 연상된다.
모두가 잠든 밤에 뜬금없이 기타 치며 “요를레이”를 외치거나(‘즐거운 밤의 노래’), 트로트 가락에다 여기저기서 구성진 꺾기 창법을 시도하는(‘난 바보가 되었습니다’) 오소영의 생명력과 활기 역시 전작들과 가장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애프터눈레코드 스튜디오 루프트탑에서 오소영. 사진/애프터눈레코드
2001년 오소영의 1집 ‘기억상실’ 편곡에 참여했던 조동익(어떤날)은 “당시 그의 데모 앨범을 듣고 작곡에 연주까지 다 해내 믿기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며 “이번 새 앨범을 들으면서 그가 새로 태어난 느낌을 받았다. 긴 세월동안 자신을 감싸고 있던 딱딱하고 오래된 껍질을 또 다시 벗어버린 것 같았다”고 추천사를 썼다.
조동익 외에도 그와 함께 해온 여러 지음(知音)들이 감상평을 보내왔다. “오소영의 노래는 위로하면서, 질문한다. 쓸쓸한 존재들인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정말 멋진 어법을 가진 우리 시대의 아티스트다”(시인과 촌장의 하덕규) “삶의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가사가 아름답다. 유별나지 않은, 자연스러운 어울림들이 일상의 특별함을 느끼게 해준다. 오소영의 어쿠스틱 기타 연주는 역시나 듣기 좋다.”(낯선 사람들의 고찬용)
“결국 제 곁에서 저를 오래 보셨던 분들에게는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던 거 같아요. 그분들은 ‘음(音)’만 듣고서도 그간의 저를 아시는 것 같았아요.”
그가 이번 앨범에서 트로트 등 여러 음악적 갈래를 시도한 것은 앞선 선배들의 영향이다. 그는 ‘하나음악’의 정신을 표현하는 ‘하나옴니버스’기획 앨범 때도 곡 ‘흐르는 물’을 쓴 적이 있다. 당시 정민아 가야금 연주자의 손을 빌려 국악 스케일의 곡을 완성했었다.
“평소 트로트에 관심이 많았어요. 제 음악은 정통 트로트보다 어쿠스틱한 성인가요 스타일이죠. 나중에 송가인씨가 제 곡을 부르는 날이 오면 행복할 것 같아요.”
싱어송라이터 오소영. 사진/애프터눈레코드
‘당신의 모서리’, ‘떠나가지마’ 같은 곡들은 기존 오소영의 문법 스타일로 완성된 사랑가다. 이 사랑가들은 직접 경험한 일화를 토대로 슬프고 아름다운, 비유적 언어들로 빚어냈다. ‘당신의 모서리를 안을 수 있게 나를 조금만 잘라낼게요/ 당신의 모서리를 품을 수 있게 나를 조금만 도려낼게요’
특히 ‘당신의 모서리’ 녹음기간 동안 그는 ‘낡은 느낌의 기타소리’를 찾는데 주력했다. 깁슨의 비싼 브랜드 기타를 사용한 적도 있긴 하지만 꼭 비싸다고 앨범에 어울린다고는 볼 수는 없었다. “곡이 오래된 소리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녹음할 때 기타 줄 같은 경우도 사용감이 조금 있는 것들을 썼어요.”
아주 처연하거나, 아주 밝거나. 앨범은 양 극단을 오가는 삶의 이야기들이다. 앨범을 듣다보면 ‘이 현실세계는 미로 같지만 그럼에도 우린 살아가고 있다. 괜찮다’며 어깨를 두드려주는 느낌이 든다.
21일 애프터눈레코드 스튜디오에서 만난 오소영.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앨범 제목처럼 오소영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예전에는 어둠 속을 걷는 기분이었는데, 요즘은 밝은 곳들도 보며 걸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요. 내 기분으로 만들 수 있는 작은 행복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해요. 바람, 햇빛, 하늘보기, 맛있는 거 먹기…, 같은 거요.”
“언제까지 음악을 할 수 있을지”는 아직 고민이지만 “창작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표현이나 악상이 떠오를 때는 20년이 다 돼가도 재밌다”며 그는 웃었다.
이번 앨범을 여행지에 빗대본다면 어떤 곳일까.
“이름을 명확하게 말할 순 없지만,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어촌 같은 곳.”
“제 음악들을 그렇게 찾아 들어주셨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많은 분들이 듣지 않으셔도 사랑해주시는 분들이 있으면 꿋꿋하게 할 수 있으니까. 아, 근데 너무 사람들이 안 찾는 어촌이면 곤란한데…. 음, 그럼 이렇게 할게요. 아는 사람들이 자주 찾는 어촌.”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