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밴드신의 ‘찬란한 광휘’를 위해 한결같이 앨범을 만들고, 공연을 하고,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TV, 차트를 가득 메우는 음악 포화에 그들은 묻혀지고, 사라진다. ‘죽어버린 밴드의 시대’라는 한 록 밴드 보컬의 넋두리처럼, 오늘날 한국 음악계는 실험성과 다양성이 소멸해 버린 지 오래다. ‘권익도의 밴드유랑’ 코너에서는 이런 슬픈 상황에서도 ‘밝게 빛나는’ 뮤지션들을 유랑자의 마음으로 산책하듯 살펴본다. (편집자 주)
서울시 관악구 신림동의 한 주택 건물 지층은 때때로 가상의 ‘득음(得音) 폭포’로 변한다. 물줄기만 없다 뿐이지 거센 한국어가 방구석 사방에 내리 꽂힌다. 흡사 영화 ‘서편제’를 보는 듯한 절경. 주택은 위치도 산중턱에 홀로 떨어져 있다. 창문만 닫는다면 이보다 근사한 방음 공간이 없다.
수직 폭포수 같은 사운드에 각진 자음들이 탄알처럼 후드득 쏟아진다. 명창의 득음이나 귀신 기운이 한껏 서린 것 같은 한국적 록의 탄생. 지난 3년간 이 절창의 순간을 지켜본 이는 벽면 사진 속 크리스 코넬이다. 90년대 초 그런지 록을 이끌었던 미 록밴드 사운드가든 리드 보컬. 마초적인 눈 찌푸림으로 박제된 코넬은 늘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웠다. ‘그렇지, 이보게들. 그게 바로 록의 맛이라고!’
지난달 27일 밴드 ABTB의 일부 멤버들[박근홍(보컬), 강대희(드러머), 장혁조(베이스)]과 2집 ‘daydream’의 기초공사를 했다는 이 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보컬 박근홍의 실제 자택이자 제 2의 스튜디오. 실제 녹음 스튜디오에 입성 전, 그러니까 ‘가녹음’은 거의 이 곳에서 진행된 편이다.
“산중턱, 반지하라는 공간적 이점이 큽니다. 새벽 3시에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도 괜찮을 정도니까요. 합주실, 녹음실도 따로 있지만 시간, 비용을 최대한 아끼고자 이 곳에서 연습을 많이 했습니다.”(근홍)
27일 서울시 관악구 신림동의 한 주택 건물 지층에서 밴드 ABTB의 일부 멤버들을 만났다. 왼쪽부터 박근홍(보컬), 강대희(드러머), 장혁조(베이스). 뒤로는 사운드가든 리드 보컬 크리스코넬의 흑백 사진이 걸려 있다.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2014년 세 사람은 ‘도원결의’ 하듯 ABTB를 결성했다. “전대미문 하드록 사운드를 해보자”는 다짐을 가슴 깊이 새겼다. 게이트 플라워즈 출신의 박근홍, 한음파 출신의 장혁조, 쿠바와 썬스트록 출신의 강대희는 당시 홍대를 누비던 음악의 고수들. 셋은 결성 당시 70년대 하드록부터 80년대 메탈, 90년대 그런지로 이어지는 록 역사 자체를 음악적 뿌리로 삼기로 했다. 뒤늦게 비슷한 취향의 96년생 기타리스트 두 명(황린, 곽상규)이 들어오면서 지금의 진영이 갖춰졌다.
“레드제플린, 메탈리카, 너바나, …. 주로 거장들 음악에서 ‘심상’을 공유해요. 그들을 교양서 삼아 근본 있는 음악을 하고 싶었습니다.”(대희)
밴드명 ABTB는 ‘Attraction Between Two Bodies’의 축약. 우주 상 모든 물체는 서로 끌어당긴다는 ‘만유인력’ 법칙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단어다. 동명의 데뷔 앨범(2016년)은 펄펄 끓는 쇳물에 가깝다. 포효하는 보컬과 묵직한 기타리프, 쉴 새 없는 리듬 난타로 무장한 이 직선적 음악은 그해 대중음악계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2017년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록 음반’을 수상했다.
하드록 밴드 ABTB. 사진/ABTB
지난달 3년 만에 낸 정규 2집에서 음악 접근법은 더 거대해졌다. 멤버들은 마치 소설 작가나 영화감독이 돼 10개의 곡 곳곳을 누빈다. 핑크 플로이드나 드림 시어터 같은 콘셉트 음반 형식의 작법을 도입했다. 대형 시놉시스, 시나리오를 짜고 어울리는 가사를 입히는 방식. 수록곡 전체는 “2016년부터 지금까지의 변화무쌍한 한국사회”를 관통한다.
첫 곡 ‘Nightmare’부터 앨범은 펄떡이며 광화문 대로변 한복판으로 향한다. 곡의 시적 화자는 최인훈 소설 ‘광장’의 주인공 같은 이다. 버스에 앉은 화자는 모세의 홍해처럼 좌우로 갈린 정치세력을 보고 염증을 느낀다. 고민하고 질문한다. ‘어느 쪽도 선택을 못하는 건 과연 죄일까?’
7분48초의 압도적 길이의 대곡은 기승전결식으로 전개된다. 의외로 다소 느린 템포, 부드러운 멜로디가 주를 이루는 초중반부를 넘어서면 절규와 매서운 드럼 난타, 소용돌이 같은 기타 리프가 맹렬히 질주한다. 기타 두 대가 허공을 휘감는 듯한 리프를 주고받는 약 3분여간의 후주에 이르면 시적 화자는 ‘백일몽’으로 침잠한다.
“메타적 관점에서 이 시대를 보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쪽을 선택하라는 강요를 받고 있진 않나. 왜 선택해야만 하나. 중립적 가치는 왜 인정받지 못하나. 그런 것들에 관한 질문입니다.”
하드록 밴드 ABTB. 사진/ABTB
백일몽에 빠진 화자는 우리 시대상이 아른 거리는 캐릭터들을 마주한다. ‘세상은 바뀌지 않으니 체념하라’는 보수주의 꼰대(‘My people’), 소셜미디어(SNS) 상에서 세치 혀를 놀리는 지식인(‘인정투쟁’).
두 극단의 캐릭터 사이에서 화자는 악을 지르며 도망간다.(‘My paradox’, ‘neurosis’) 의식을 잃고 꿈의 우주를 방랑(‘daydream’)한다. 전자기타의 몽롱한 아르페지오에 일말의 희망을 실어 보내며. ‘모진 비바람 몰아쳐도/오직 그 날을 기다리네/오지 않더라도’(‘가이없다’)
힙합과 댄스, 전자음악이 득세하는 이 시대에 흔히 하드록은 저물었다고들 한다. 하지만 이들은 이러한 상황을 역으로 이용, 대중과 가사로 호흡한다. 시대를 거울처럼 담아낸 노랫말들은 사운드를 든든히 받쳐주는 제 2의 악기나 이펙터, 일종의 공감장치다.
“음악이 꼭 사회를 반영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시대성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아이돌이 아닌 이상 뭔가가 필요하다고도 생각했습니다.”(근홍)
다만 이들은 “음악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반영일 뿐,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수단은 아니다”라며 “거울처럼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반영하는 게 우리 음악인들이 할 일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코로나19 사태 직전 작업이 완료돼 이를 담지 못한 것은 아쉽다”고도 했다.
흔히 하드록이라 하면 거칠기만 한 쇳소리가 연상되지만 이들의 신보는 의외로 투명하고 아름답다. 특징적인 멜로디와 기타 리프를 곳곳에 배치시킴으로써 귀에 확확 감기는 효과를 냈다. “저희는 록도 대중음악이며 멜로디가 없는 대중음악이란 성립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후반 작업 때 1집의 배로 시간을 들여 특징적인 멜로디들을 최대한 살려봤습니다. ‘록이라면 당연히 이래야지’ 하는 당위 같은 게 저희는 없습니다. 이제는 록 밴드라 하면 욕에 가까운 시대지 않습니까.”(근홍) “이제는 차라리 힙합 밴드, 소울 밴드로 불렸으면 좋겠습니다.”(혁조)
ABTB 2집 'daydream'. 사진/ABTB
손을 뻗는 사람의 검은 실루엣이 보라 배경과 대비를 이루는 이번 음반 커버도 예사롭지 않다. ‘스토리식’ 수록곡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멤버 대희가 직접 쓴 소설도 보라색은 주된 심상으로 나온다. “최인훈의 ‘회색인’이라는 소설에 보면 회색은 흑과 백 사이 중간을 상징해요. 빨강과 파랑 사이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중간색으로 표현해봤어요.”(대희) “보라색은 흔히 비정상의 색이라고도 하죠. 판단을 유보하고 중간 지대에 선 우리는 과연 비정상인가, 하는 질문도 되죠.”(근홍)
곡 ‘daydream’의 2분여 도입부는 신중현의 아들인 기타리스트 신윤철이 도움을 보탰다. “우리나라에서 ‘아름다운 기타’를 치는 사람 중 최고라고 생각했습니다. 솔로 같으면서도 백킹 같은 오묘하고 아름다운 멜로디 라인을 보내주셔서 감사했습니다.”(대희)
파열음, 된소리, 거센소리가 파편처럼 튀는 한국어 가사는 ABTB 음악 만의 묘미다. 여기에 넝쿨처럼 얽히고설킨 날 것의 사운드는 오와 열을 맞춘 오늘날 수많은 공장식 음악들과 차별화를 이룬다.
마지막으로 이들에게 물었다. 신보를 여행지에 빗대보고 그 이유를 말해본다면.
“아이돌 가수들의 음악을 세계적인 대도시라 가정하면 저희 음악은 한국적 정서가 아른거리는 조그만 동네 같은 느낌이죠.”(혁조)
“제주도에서 열심히 영업하는 돈까스 맛집 같은 곳. 그런 곳들은 텐트까지 치고 기다리는 단골 손님들이 있지 않습니까. 일단 맛을 보시면 좋아하실 음악입니다.”(근홍)
“글래스톤베리나 샌프란시스코. 성소수자부터 여러 인종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있더군요. 다양한 개성이 섞이면서도 하나의 질서를 이루는 느낌. 우리 멤버들과 우리 사운드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합니다.”(대희)
“아, 갑자기 강헌 선생님의 말씀도 떠오릅니다.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나라, 다이내믹 코리아. 모든 게 안 되는 것도 아니지만 모든 게 다 가능하지도 않은 우리나라, 코리아”(근홍)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