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익도의 밴드유랑)‘수상한 시절, 내적댄스만 춰?’ 이날치 들어봐

유튜브 조회수 160만 “이것이 조선팝” 열광…코로나 후 해외 진출 계획
“우리는 아이돌 K팝과 달라…밴드·소리꾼·안무 얽히고설킨 댄스 유발 음악”

입력 : 2020-06-19 오전 12:00:00
[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밴드신의 ‘찬란한 광휘’를 위해 한결같이 앨범을 만들고, 공연을 하고,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TV, 차트를 가득 메우는 음악 포화에 그들은 묻혀지고, 사라진다. ‘죽어버린 밴드의 시대’라는 한 록 밴드 보컬의 넋두리처럼, 오늘날 한국 음악계는 실험성과 다양성이 소멸해 버린 지 오래다. ‘권익도의 밴드유랑’ 코너에서는 이런 슬픈 상황에서도 ‘밝게 빛나는’ 뮤지션들을 유랑자의 마음으로 산책하듯 살펴본다. (편집자 주)
 
11~12일 서울 강남구 LG아트센터에서 열린 밴드 이날치의 공연. 사진/LG아트센터
 
“하, 이 수상한 시절. 모두들 내적 댄스만 추는디….”
 
첫 아니리(판소리에서 말로 전하는 이야기로, 창과 대비되는 개념) 대목부터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가 뒤섞였다. 오늘날 코로나 시대를 조선 시대에 겹쳐낸 해학적 농담. 좌중들 폭소로 마스크 500여개가 동시에 들썩였다.
 
11일 서울 강남구 LG아트센터에서 본 밴드 이날치의 공연은 이처럼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주로 노래로 시작하는 기존 대중음악 공연의 정형화된 틀을 단박에 탈피. 시작부터 관객들과 어우러진 신명의 ‘판’이 됐다. 
 
뉴 웨이브풍 리듬 위 구수한 한국 전래는 신명난 광대처럼 외줄을 탔다. 호랑이 걸음걸이를 연상시키는 베이스라인과 갓을 쓰고 흐물거리는 안무단들(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 속사포 랩처럼 쏟아지는 아니리와 네 갈래로 뿜어지는 화사한 창…. 판소리 다섯 마당 가운데 하나인 ‘수궁가’를 현대적으로 요리한 이 공연은 한 편의 뮤지컬, 압도적 종합 예술에 빨려드는 환영에 가까웠다. 
 
이날부터 다음날까지 진행한 공연은 5월29일 발매된 정규 1집 ‘수궁가’를 기념하기 위한 자리. ‘거리두기 좌석제’에도 양일 마스크를 쓴 관객 1000명이 1~3층을 꽉 채울 정도로 뜨거웠다. 관객 중에는 외국인도 심심찮게 눈에 들어왔다.
 
밴드 이날치. 정중엽(베이스). 이철희(드럼), 이나래(보컬), 안이호(보컬). 권송희(보컬), 신유진(보컬). 장영규(베이스). 사진/Woosanghee Studio
 
최근 대중음악계의 파란을 일으키고 있는 이들을 16일 서울 합정 인근 밴드의 매니지먼트사 ‘잔파’ 사무실에서 만났다. 밴드는 “거리두기 좌석제로 당시 반응이 어땠는지는 들썩거리는 마스크로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라면서도 “주변에서 ‘세계로 수출해야 하지 않겠냐’는 얘기를 몇 차례 들어 기분은 좋다”고 했다. 당초 이들은 해외 활동도 계획하고 있었으나 최근 코로나19 여파로 국내 활동에만 집중하고 있는 상태다.
 
이날치를 이끄는 주축은 장영규다. 영화 ‘타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곡성’, ‘부산행’의 음악감독이자 어어부프로젝트, 씽씽의 멤버로 활동하던 뮤지션. 그는 설치미술 작업과 국립무용단 작품 연출 이력도 있지만 “그런 ‘일회적 작업’을 탈피하고 싶어 이 밴드를 하는 것”이라며 “그간 열과 성을 다해 공연 하나를 올리더라도 재연되기 힘든 상황이 많았다. 사람과 조명, 음악만 있으면 충분하지 않나, 란 생각에서 이 밴드를 시작하게 됐다”고 했다.
 
2017년 음악극 ‘드라곤 킹’을 계기로 장 감독은 젊은 소리꾼 넷(안이호, 이나래, 권송희, 신유진)과 만났다. 2년 뒤 정중엽(전 ‘장기하와 얼굴들’ 베이시스트), 이철희(전 ‘씽씽’ 드러머)가 합세해 지금의 밴드 진영이 갖춰졌다. 
 
처음엔 서울 홍대 부근 클럽을 시작으로 현대카드 언더스테이지, 잔다리 페스타 등 프로젝트성 공연에 나섰다. 그러다 작년 말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가 가세한 네이버 ‘온스테이지’ 영상이 ‘대박’이 났다. ‘케이팝을 뛰어넘는 조선팝’이라며 열광하는 추종자가 늘었다. 영상은 17일 기준 현재 조회수 160만을 넘어서며 세계로 퍼져가고 있다. 
 
엠비규어스댄스컴퍼니와 밴드 이날치의 온스테이지 영상. 사진/유튜브 캡처
 
“처음부터 정교하게 조직된 팀은 아니었습니다. 안무 같은 경우도 전적으로 앰비규어스 쪽에 맡겼었고요.”(장영규) ‘수궁가’란 대주제 아래 밴드와 소리꾼, 안무팀 각자의 ‘놀이 판’이 넝쿨처럼 얽히고설켰다. 판소리의 원형성만 보존한 채 ‘수궁가’의 모든 것은 해체됐다. 넘실대는 소울과 힙합, 디스코풍의 성수를 꿈틀대는 현대적 안무에 들이부은 격. 컨트롤타워의 지시에 자를 재듯 짜맞추는 ‘아이돌 중심의 K팝’과는 DNA부터가 다르다. “K팝 백댄서들이 가수를 백업하는 느낌에 가깝다면, 저희는 세 개성이 한 무대에서 충돌해 노는 형태에 더 가깝죠,”(장영규) “저희 집단에는 누가 주인공이냐가 없습니다. 각자가 얽히고설키는 거죠.”(정중엽)
 
이날치란 이름은 조선 후기 판소리 명창 이날치(1820~1892, 본명 이경숙)에서 따왔다. 팔명창에 속하는 인물. 날치는 ‘날치 같이 낼쌔게 줄을 잘 탄다’고 해서 얻어진 예명이다. “판소리에 관한 재미있는 단어를 찾다 발견했습니다. 들었을 때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싶을 정도로 재밌었습니다.”(장영규) “날 것 같은 느낌도 저희와 잘 맞았던 것 같습니다.”(안이호)
 
판소리 다섯 마당 가운데 수궁가로 출사표를 던진 이유는 특유의 ‘발랄함’ 때문이다. “통통 튀고 다채로운 동물 캐릭터들”이 제법 댄서블한 전자음악과 어울리는 느낌이 있었다. 대중음악 리듬에 창의 박자를 맞춰가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지만, 이 과정에서 창조적인 결과물이 팝콘처럼 터져 나왔다.
 
이를테면 곡 ‘범이 내려온다’의 도입부 판소리 원전은 엇모리장단을 기반으로 한다. 이를 전자음악의 빠른 템포에 우겨 넣다보니 8분의 12박자, 자진모리장단으로 재창조됐다. “국악과 대중음악 간 리듬이 묘하게 어긋나는 듯 맞물리는 지점이 있었습니다. 새로운 음악들은 대체로 그 조율 과정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장영규)
 
밴드 이날치. 사진/Woosanghee Studio
 
밴드 편제는 고수(鼓手)의 북반주, 소리만으로 이뤄지는 판소리 원형에서 따왔다. 기타와 같은 화성악기는 최대한 배제했다. 신디사이저는 화성보단 효과음(FX)이나 소리꾼의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사용됐다. 실제 공연장에서는 베이스 두 대와 드럼의 난타가 80년대 뉴웨이브를 연상시킬 정도의 그루브를 뿜어낸다. 심장박동처럼 펄떡거리는 리듬이 실로 내적댄스를 추동한다. “한때 모트 가슨, 브라이언 이노의 음악을 많이 들은 적이 있지만 이날치 작업 때는 오히려 멀리했어요. 은연 중에라도 곡에 묻어 나올까 염려가 돼서요...”(정중엽)
 
용왕이 갑자기 속병을 얻었다는 ‘약성가’를 시작으로 앨범은 토끼 간을 구하기 위한 원작 서사를 파노라마처럼 펼쳐댄다. 실제 공연장 라이브에선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가 각 물고기들처럼 유영하는 ‘어류도감’, 빠른 힙합 랩처럼 치고 나가는 ‘좌우나졸’ 같은 곡들의 생생함이 더 크게 다가온다.
 
본래 ‘수궁가’는 별주부가 용왕의 병을 고치기 위해 토끼를 속여 용궁으로 데려오지만, 토끼가 기지를 발휘해 육지로 살아 나온다는 내용의 현전 판소리 작품. 바다 세계의 신의와 배신을 주로 다루는 이 작품은 갑질횡포, 사내정치, 살기 위해 속고 속이는 서스펜스와 반전 등 동시대에 크게 공감될 내용이 적지 않다. “수궁가가 담고 있는 사회적 억압 같은 메시지에 공감해주신다면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희 음악은 인간의 오랜 기본적 욕구에 더 충실한 것 같아요. 춤추고 놀기에 좋은 그런거요.”(안이호)
 
11~12일 서울 강남구 LG아트센터에서 열린 밴드 이날치의 공연. 사진/LG아트센터
 
이들은 “국악의 세계화 같은 거창한 미션보다는 대중음악·팝시장을 겨냥한 음악”이라 했다. 국내가 됐든, 해외가 됐든 “시장이 있고 자신들의 예술적 취지가 맞다면” 무대에 오를 계획이다. 오는 7월18~19일 강원 철원군 고석정 일대에서 열리는 ‘DMZ 피스 트레인 뮤직 페스티벌’에 출연한다. 
 
LP의 소장가치가 점점 커지는 이 시대 흐름에 따르기로 했다. 앨범은 CD를 제외하고 LP와 디지털 음원으로만 나왔다. “손에 쥘 수 있는 개념이 더 중요해진 것 같아요. 그런 관점에서 더 뿌듯한 걸 만들자 생각했던 것 같아요.”(장영규) 
 
전례 없는 이 음악은 어떤 느낌의 여행지에 가까울까.
 
“베를린이 생각나네요. 동네 슈퍼만 가도 ‘쿵치 쿵치’ 댄서블한 리듬이 올라오거든요. 크라프트베르크의 고향이기도 하고, 클럽 파티들도 유명하죠.”(정중엽)
 
“일을 아주 ‘전투적’으로 할 때도 좋을 것 같아. ‘쿵치 쿵치’ 리듬 타면서.”(이나래) 
 
“실제로 영국에 디자인 하는 친구도 일 할 때 우리 노래 틀어놓는다고...”(정중엽)
 
“직관적으로는 스페인 이비자섬 아니야? 진탕 놀고 싶은 사람들이 오는 곳.”(이나래)
 
“돈 모아가서 개털 되는 곳? 수궁가니까 그럼 우리 다 같이 수영복 입고 입수 어뗘?”(안이호)
 
“와하하하.”(모두들)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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