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인, 특히 변호사 중에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애증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사상적으로는 노무현 대통령을 존경하고 좋아해도 노대통령이 ‘사법시험’을 없애고, ‘로스쿨’을 만들면서 변호사 수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려 전통적인 시장 질서를 망가뜨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필자는 사법시험 45회 합격생으로 35기로 연수원에 들어갔다가 아이를 낳느라 1년 휴학을 하는 바람에 연수원을 36기로 수료했다. 그리고 내가 받은 변호사 번호는 10197이었는데 이는 내가 대한민국에 등록한 변호인 중 1만 197번째라는 뜻이다. 그때가 2007년 2월이었으니 대한민국 법조 역사를 생각해본다면 결국 100년 동안 변호사를 만 명밖에 안 뽑았다는 얘기다.
그러다보니, 변호사만 되면 무조건 앞날이 보장되는 시기가 있었고, 기득권들은 변호사들을 많이 뽑고 싶어 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어렵다는 시험에 합격했다는 자부심, 실력 없는 사람은 안 된다는 오만함, 누구도 나보다 쉽게 법조계에 발을 들이게 하고 싶지는 않다는 진입장벽의 문제, 그리고 사람을 많이 뽑아서 법조인의 가치를 스스로 떨어트리지 않겠다는 허영심 등으로 오히려 법무사, 행정서사, 변리사, 세무사 등등 많은 유사직역들이 변호사들보다 훨씬 많이 생기게 되었다.
결국, 학교 졸업하고 평생 시험공부만 해도 사법시험에 못 붙는 인사들이 수두룩했고, 고시낭인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양산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후유증으로, 시험을 쉽게 만들어 변호사를 많이 양산하자는 여론이 계속됐고, 급기야는 ‘왜 변호사 자격이 있는 사람은 택시 운전사를 하면 안되느냐’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나오면서,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사법시험이 없어지고 로스쿨로 대치되는 법안이 통과됐다.
그 결과 변호사 만 명 만드는데 100년이 걸리던 것이, 지금은 몇 년 만에 변호사가 4만명 5만명에 육박하게 되었다. 사정이 이러니, 당시 대통령이 사학연금법과 교환용으로 사법시험 폐지를 이용했다는 얘기까지 나오면서 기존 법조인들이 노 대통령의 진보적 정책 수립과 그 결과에 극도로 반감을 가지게 된 것이다.
변호사 숫자를 늘리는 싸움은 변호사들에게 늘 불리하게 마련이었다. 변호사들은 숫자도 모자랐지만, 자기 의뢰인이 불이익을 당할까봐 재판이나 검찰업무를 임의대로 중단할 수가 없다. 그랬다가 날짜라도 지키지 못하고 실제로 불이익을 당하면 그건 본인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일반 국민들은 정부 정책에 당연히 찬성하는 입장일 뿐 아니라, 변호사들과 같은 태생인 판사들과 검사들은 당장 공무원 신분이니 변호사들과 동조를 맞추기가 어렵다. 게다가 이들은 기본적으로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어 정부에 맞서 효율적인 단체행동을 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나서 의과대학생 정원 문제가 터졌다. 세상이 변하면서 ‘숫자’싸움이 중요하게 된 것은 누구나 알겠지만 그래도 의사들은 법조인들보다는 수가 10배나 많기 때문에 의대 정원을 늘리려는 정부 정책은 상당히 조심스럽게 진행되어 왔는데, 이번 코로나 사태를 맞이하고 공공의료 정책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정부가 의대 정원을 10년 동안 400명 늘리겠다고 했다가 호되게 대가를 치르게 된 것이다.
정부와의 ‘숫자 싸움’에서 의사들은 법조인들과 사정이 다르다. 이들은 국민의 목숨을 담보로 한다. 물론, 목숨을 담보로 하니 비난여지는 더 크겠지만, 어쨌든 이들이 협조하지 않고 진료실로 복귀하지 않으면 당장 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환자들이다.
그러다 보니 의사들의 집단행동은 정부로서도 함부로 무시하고 넘어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목숨이라고 하는 것은 ‘도저히 미룰 수 없는’ 시한폭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사들의 집단 행동에서 정부가 이기는 건 쉽지 않다.
이번 정부의 공공의료 정책에 대한 의사들의 반대 투쟁은 크게 세 집단이 한 것이다. 의사협회, 대한전공의협회, 그리고 의대생집단. 물론 선두에 나서 정부와 투쟁을 시작한 것은 의사협회였지만, 실력 행사를 하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고자 했던 세력은 전공의협회들이었고, 결국 지금은 국시응시마저 거부한 의대생집단만 남아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다.
사실, 의사협회나 전공의협회는 일단 의사 국가고시는 다 통과한 사람들이므로 싸우다 돌아간다 해도 그렇게 큰 피해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의대생들은 경우가 다르다. 이들이 의사 시험에 응시하지 않는다면 개인적으로는 그야말로 ‘생으로 1년을 날리는 것’이고, 공익적 측면에서도 의료인력 수급에 큰 비상이 걸리게 된다.
의대 4학년들의 경우 ‘국시 응시’라는 것을 두고 정부와 싸우며 큰 도박을 한 것이겠지만 결국 이번의 총 파업으로 인해 그들이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인가. 국민 여론이 극도로 나빠진 상태에서 이들에게 국시 응시 기회를 주지 말자는 국민 청원은 13일 정오 기준으로 54만명이 넘는 동의를 받았다.
무소속의 홍준표 의원은 지난 5일, ‘문재인정권 출범 후 좌파정권의 패악을 최초로 굴복시킨 것은 야당이 아닌 의료계’라고 추켜세웠으나, 그의 칭찬 한 마디로 국시에 응시할 기회를 잃어버린 예비 의사들의 마음이 위로를 받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