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4일 오전 10시, 서울 용산구 한남동 인근에 위치한 현대카드 ‘바이닐앤플라스틱’. 수많은 LP 판들을 가로질러 계단을 밟자, 반투명 유리창이 크리스털처럼 반짝거렸다. 도열된 장서들이 서서히 실루엣을 드러냈다.
오는 9일 정식 개관하는 ‘현대카드 아트 라이브러리’를 미리 다녀왔다. 바이닐앤플라스틱 건물 2층을 ‘컨템포러리 아트(Contemporary Art)’ 관련 6000권의 서적과 미디어 영상 자료로 꾸민 공간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유럽의 아늑한 서점 같은 정경이 관람객들을 맞는다. 금색 램프에서 뿜어져 나오는 은은한 노란 불빛과 고풍스러운 목재 의자, 해리포터 그리핀도르에서나 볼 법한 길죽한 테이블 라운지….
세계적인 북 큐레이터 4인(독일 프랑크푸르트 슈테델슐레 예술대학 학장 야스밀 레이몬드·영국 마게이트 지역에 위치한 유명 미술관 터너 컨템포러리 관장 클래리 월리스·뉴욕 모마(MoMA·현대미술관)의 필름 부문 큐레이터인 소피 카볼라코스·뉴욕 모마 라이브러리 총괄인 질리안 수라레즈)이 현대미술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아티스트와 사조를 추린 후 관련 도서를 선별해 진열했다.
현대카드 '아트라이브러리'. 사진=현대카드
이날 이곳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 질리안 수라레즈, 소피 카볼라코스와 함께 참여한 류수진 현대카드 브랜드 본부장은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의 주도로 지난 몇 년간 유럽 서점으로 인사이트 투어를 다녔다. 헤밍웨이와 만 레이가 즐겨 찾았다는 파리의 예술 서점 셰익스피어앤컴퍼니와 같은 곳이 한국에도 있으면 좋겠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고 했다.
아트 라이브러리의 콘셉트는 ‘무심코 들렀을 때의 동네 책방 같은 곳’이다. 류 본부장은 “따뜻하고 아늑한 느낌 속에서 우연한 발견을 할 수 있길 바랐다. 일상과 아트의 경계를 없애는 경험을 전달하고 싶었다. 1층(바이닐앤플라스틱)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2층의 서적·영상물들이 함께 자연스럽게 관람객에게 ‘총체적 경험’이 되길 바랐다”고 설명했다.
‘전권 컬렉션(Complete Collection)’ 코너는 특히 예술 학도들이나 애호가들의 눈길을 끌 것으로 보인다. 모마가 최근까지 발행한 전시 도록 710권 전체와 베니스 비엔날레(Venice Biennale)가 지금까지 선보였던 카탈로그 98권 전체를 살펴볼 수 있다. 이날 가이드에 나선 홍남경 팀장은 1929년 모마의 첫 전시 도록 앞에서 “모마가 세워지던 시기의 컬렉션을 살펴보며 현대 미술사의 흐름을 조망할 수 있을 것”이라 짚어줬다. 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베니스비엔날레 사진집 ‘The Family of Man’을 넘기며 “1968년부터 첫 컬러 도록이 시도됐음을 알 수 있다. 예술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라고 설명했다.
현대카드 '아트라이브러리'에 전시된 '모마' 도록 전권 컬렉션. 정중앙에 있는 도록이 1929년 모마의 첫 전시 도록이다.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아티스트가 직접 만든 책 ‘아티스트 퍼블리싱북(Artist's Publishing Books)’ 역시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희귀 서적들이다. 현대카드 측은 지난해부터 약 1년 8개월 가량 30개국 이상을 돌며 해당 작품들의 수집에 나섰다. 루치오 폰타나가 200부 한정으로 찍은 아티스트 북 ‘공간 개념(Concetto Spaziale)’은 경매가로 약 3000만원. 홍남경 팀장은 “책에 구멍을 냄으로써 평면 개념을 입체 개념으로 환원시킨 작품”이라며 “관객들에게 희귀본을 보여드리기 위해 옥션 사이트를 오가며 리미티드에디션 사수에 주력했다”고 했다. 해당 코너에는 앤디워홀의 ‘앤디워홀 인덱스(Andy Warhol's Index)’, 디터 로스의 ‘킨더부흐(Kinder Buch)’, 로버트 모리스의 ‘제록스북(Xerox Book)’ 등 40권을 만날 수 있다. 비치된 손 장갑을 착용하기만 하면 관람이 가능하다.
현대카드 '아트라이브러리'. 루치오 폰타나가 200부 한정으로 찍은 아티스트 북 ‘공간 개념(Concetto Spaziale)’.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예술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1960~1970년대 영상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는 코너도 마련돼 있다. 미국 EAI 영상아카이브 센터와 협업한 ‘무빙 이미지 룸(Moving Image Room)’이다. 빌 비올라(Bill Viola), 비토 아콘치(Vito Acconci), 조안 조나스(Joan Jonas), 백남준 등이 제작한 미디어 아트 작품들을 컴퓨터로 만나볼 수 있다. 소피 카볼라코스 뉴욕 모마의 필름 부문 큐레이터는 “모마는 곧 아트와 정치에 관한 프로젝트를 시작한다”며 “무빙룸의 영상 작품들을 큐레이션할 때도 해당 부분을 고려했다. 향후 모마의 방향성을 고민해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공간 조성과 계획은 현대카드가 2006년부터 모마와 파트너십을 맺고 50여차례 주요 전시 단독 후원(국내 설치미술가 양혜규씨와 미국 미니멀리즘 선구자 도널드 저드 등)에 이은 활동의 연장선이다.
질리안 수아레즈 뉴욕 모마 라이브러리 총괄은 ‘미술관이 만든 라이브러리와 현대카드라는 기업이 만든 라이브러리 간 차이’를 묻는 질문에 “수많은 세월 통해 축적된 모마의 컬렉션이 과거의 유산이라면 아트라이브러리는 ‘미래 예술이 어떻게 성장할지’를 주안에 두고 만든 결과물”이라며 “그러나 관람객을 최우선에 두고 상호작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고 답했다.
또 “단지 책 뿐 아니라 비디오와 필름, 사진 등 다양한 매체를 망라한 공간이길 바랐다”며 “관람객들이 아트와 현대미술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와 함께 특수한 부분에 대한 정보까지 얻어갔으면 한다. 향후 5~10년 뒤 펼쳐질 변화까지 수용해서 어떤 방향으로 현대미술이 나아갈지 중추적 역할을 하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현대카드 '아트라이브러리' 1960~1970년대 영상 예술 작품을 볼 수 있는 존. 사진=현대카드
다만, 아트라이브러리 내 책들은 구입비용이 지나치게 높아 조심스럽게 다뤄야하는 데다, 90%가 영어 원서라, '무심코 들린 동네 책방'이라는 당초 콘셉트와 가치를 관람객들에게 어떻게 전달할지는 변수로 남는다. 예술 영역의 대중화를 기치로 걸었으나, 영어 접근이 힘든 일부 시민들에게까지 닿을 수 있을지 의문점이다. 이에 대해 류 본부장은 "상주하는 직원들이 해설을 돕는 식으로 관람객들 이해에 최선의 노력을 할 것"이라 했다.
현대카드는 2013년 디자인 라이브러리(서울 종로구 가회동)를 시작으로, 트래블 라이브러리(2014·운영 종료), 뮤직 라이브러리(2015·서울 이태원), 쿠킹 라이브러리(2017·서울 청담동)를 차례로 개관해왔다. ‘다양한 영감의 공간’이란 주제 아래 공간을 중심으로 문화 마케팅을 펼쳐왔다.
현대카드 '아트라이브러리'. 사진=현대카드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