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변소인 기자] "119도 연결이 안 되고 한전도 전화를 안 받아요. 아무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어서 그저 막막합니다. 장사를 다시 하려면 냉장고부터 구매해야 하는데 자금은 어디서 마련해야 할지…"
지난 8일 밤 악몽같은 침수를 당한 이들은 하나같이 구제를 요청할 곳이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쏟아지는 신고에 119와 한국전력공사는 통화 연결조차 쉽지 않았다. 물이 차고 전기가 끊어져 칠흑 같은 어둠이 이어졌지만 지방자치단체, 유관부처에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서울 동작구 사당동 남성사계시장의 한 상인은 9일 새벽 단전으로 전등에 불이 들어오지 않자 촛불 3개를 켜놓고 전기선 작업을 시작했다. 물이 가게 안으로 들어오면서 전선이 위험해 보여 한전에 연락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결국 이 상인은 배선차단기를 내리고 희미한 촛불에 의지하며 전선을 정리했다.
가득찬 물을 빼내기 위해 가게에 있는 반찬통을 사용했다. 한 번에 많은 양을 퍼낼 수 있는 양동이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물을 빼내는 용도로 쓰이는 쓰레받기도 동이 나 상인들은 질퍽이는 바닥에서 한참을 씨름해야 했다.
지난 9일 동작구 사당동 남성사계시장에 집기들이 길거리에 널브러져 있다. (사진=변소인 기자)
동작구 상도동 성대전통시장에서는 각 건물마다 지하에 쌓인 물을 호스로 뽑아내기 바빴다. 호스 같은 도구는 상인들이 스스로 구해야만 했다. 한 상인은 "나는 소방서에서 호스를 빌렸고 옆집은 주민센터에서 빌렸는데 이제는 이것도 다 떨어졌을 거다. 이것도 없으면 (물을) 못 빼는 것"이라고 말했다.
침수 피해를 입은 시장 상인들에게 지자체나 정부 단체 등으로부터 어떠한 지침이라도 받은 적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아무런 공지나 통보도 받지 못했다고 답했다. 이들이 본 지자체의 대처는 빗물에 둥둥 떠다녔던 폐냉장고를 수거해가는 모습이 전부였다.
피해 이튿날이 되도록 아무런 지원책이나 제대로 된 대책이 나오지 않아 상인들의 답답함과 막연함은 가중됐다. 재난을 예견하고, 재난상황에서 발 빠르게 피해 규모를 파악해 대책을 세우고 시행하는 '컨트롤타워'가 부재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중소벤처기업부는 피해 3일째인 10일 오후에서야 부랴부랴 전통시장 수해 복구 대책을 내놨다. '긴급복구비'를 통해 시장당 1000만원까지 지원하겠다고 발표했으나 상인들의 반응은 떨떠름하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서울 성대전통시장과 관악신사시장의 경우 피해 점포가 100여 개에 달하는데 1000만원을 온전히 점포 지원에 쓴다고 쳐도 각 점포당 지원금은 10만원도 채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해당 소식을 접한 시장상인은 "점포당 1000만원이죠?"라고 되물었다.
국민의힘 최승재 의원은 "전통시장 안에 얼마나 가게가 많은데 시장당 1000만원은 고무장갑이나 사라는 건가"라며 "당장 영업을 할 수 없고 손님이 올 수 없는 상황에서 긴급구호를 통해 최소한 먹고 살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 의원은 "밥도 못 먹고 피해를 복구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에 밥차라도 보내야 하고 복구 기간 동안 임대료, 수도료, 전기료 등도 면제해줘야 한다"며 "재해가 되풀이 되고 있고, 수십년만의 폭우임에도 대응은 달라진 게 없이 똑같다"고 꼬집었다. 이어 "정부가 선대출해 상인들을 지원하는 편이 상인들이 기초생활 수급자로 전락하고 연체되는 데 들어가는 비용보다 적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위기 발생 시 단순 긴급 지원이 아닌 장기적인 관점의 정책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이를테면 풍수해로 인한 피해를 보상받을 수 있는 풍수해보험의 시장상인 가입률을 늘리는 식의 접근이 좀 더 효과적이라는 주장이다.
정은애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소상공인들이 자연재해에 대한 피해를 보상받으려면 풍수해보험이 효과적인데 생계형 소상공인들은 추가로 돈을 내서 보험을 가입하는 것에 소극적인 경향이 있다"며 "상품자체도 소상공인에게 끌릴 만하게 매력적으로 설계되지도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자발적으로 가입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소상공인들은 언제 닥칠지도 모르는 재해 관련 보험료에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며 "자주 발생하는 미세먼지, 해일, 감염병 등을 패키지 상품으로 묶어서 소상공인들의 경영관리 차원으로 접근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 연구위원은 가입률을 높이기 위해 정부가 원금의 일부를 보장해 주는 것도 방법이라고 제안했다.
지난 9일 이건수씨가 자원봉사로 동작구 사당동 남성사계시장의 한 가게의 전기 공사를 진행했다. (사진=변소인 기자)
한편, 대책 공백이 이어지는 동안 한 전통시장의 처참한 현장엔 개인 자원봉사자가 등장했다. 인테리어업체를 운영하는 이건수(남·25)씨는 9일 전기 수리를 위해 남성사계시장을 찾았다. 이씨는 자영업자 인터넷 카페를 통해 "저는 인테리어 업자지만 전기 회사를 다녔어서 시공을 직접합니다. 이번 주 폭우가 심해서 클라이언트가 일을 쉬라고 하셔서 누전되신 분들을 대상으로 무료로 문제점을 봐드리고 남는 자재들로 수리해드리려고 합니다"라는 글을 남겼다.
이 글을 본 남성사계시장 상인은 "저희 가게가 침수되었는데 누전으로 암흑이다. 한전에서는 못 봐준다고 한다. 전기라도 들어와야 뭐라도 할 텐데 손을 쓸 수가 없다"고 호소했고 이씨는 바로 이수역으로 향해 3시간에 걸친 작업 끝에 불빛을 되살렸다. 해당 상인은 "재능기부를 하신 거다. 이렇게 고마운 분이 없다"고 말했다. 그렇게 정부 정책이 비어 있는 자리에서, 자원봉사자의 활동만이 빛나고 있었다.
변소인 기자 byline@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