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익도의 밴드유랑)"빌리"·"이지"…Z세대 록은 다르다

발라드부터 웅얼거리는 랩 섞은 '세련된 록'에 열광
빌리 아일리시 공연에 마룬5 음향 엔지니어 붙어 '동굴 음향' 극복
이지 라이프도 첫 내한…조명 연출과 자유분방 퍼포먼스 눈길

입력 : 2022-08-18 오후 5:33:33
[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암전, 검은 유령의 이미지가 망령처럼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음악과 공연 말고 다른 정보들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입국일과 호텔, 체류기간, 출국일...
 
흔히 글로벌 음반사 소속인 대형 해외 팝스타들은 내한 시 이른바 직배사라 불리는 한국 법인 담당자들과 가장 가까이 소통한다. 담당자들이 이끄는 '한국식 문화체험'은 일종의 '통과 의례'다. 언론사가 마이너고, 유튜브가 메이저인 시대 조회수를 고려한 전략들은 즐비하다.
 
고궁이나 절 답사부터 '한국식 바베큐'라 통용되는 삼겹살집을 데려가고, 심지어 '한국식 헤어컷'을 하는 영상까지, 그야말로 무궁무진한 레퍼토리의 시대다.
 
그러나 그는 오로지 음악과 공연 외 다른 행보로 '소비'되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직배사 직원들에게조차 가장 기본 정보인 입국 시간을 포함한 어떤 정보도 공유하지 않았다고 한다.
 
15일 저녁 8시, 서울 구로구 고척스카이돔에서 두 번째 내한 단독 공연을 연 빌리 아일리시. 사진=현대카드
 
그래서 블랙. 빌리 아일리시는 블랙이고, 지금 현상이다.
 
15일 6시 반경, 서울 구로구 고척스카이돔은 아일리시의 패션을 따라 잡으려는 수천 인파로 뒤엉켜 있었다. 투톤컬러와 세기 말 록스타들의 메탈 티셔츠를 입은 Z세대들의 군열이 장관이었다. 공연 시간을 두 시간 여 앞두고 빗줄기가 굵어졌다. '빌리 듣기 좋은 날', 호러나 공포를 연상시키는 날씨는 그의 음악과 닮아 있었다.
 
이날 빌리가 4년 만에 한국 팬들 앞에서 선보인 무대는 지금 세계 음악신에서, 가장 세련된 록 기반 음악이 무엇인지 여실히 증명한 무대였다. 힙합과 알앤비, 그리고 발라드까지 영역을 확장한 록 사운드의 이 뮤지션을 왜 세계 대중음악계에서 '21세기 너바나'라고까지 부르는지 1시간 반 가량 라이브가 입증했다.
 
10대 시절인 5년여 전, 침대 위에서 흥얼거리던 음악(베드룸 팝)은 이제 새로운 세대 '룸(공연장)의 록'으로 향하고 있다.
 
빌리는 2001년생 최연소 나이로 39년 만에 그래미어워즈 본상 4개(올해의 레코드, 올해의 노래, 올해의 앨범, 올해의 신인상·2020년)를 휩쓴 파란의 주인공. 이후 2집 정규 앨범 'Happier Than Ever'로 '올해의 앨범', '올해의 노래'를 포함 지금까지 그래미 본상만 9개(총 그래미 16관왕)의 영예를 기록 중이다.
 
15일 저녁 8시, 서울 구로구 고척스카이돔에서 두 번째 내한 단독 공연을 연 빌리 아일리시. 사진=현대카드
 
이번 내한 공연(현대카드 주최·라이브네이션코리아 주관)에서 2만 명의 관객이 몰린 가운데, 빌리는 1시간 20분 가량 총 22곡(입장곡과 퇴장곡 제외)을 소화했다. 작년 5월 발표한 두번째 정규 앨범 'Happier Than Ever' 월드 투어의 일환인 만큼, 이 앨범 수록곡을 비롯, 첫 정규작 'WHEN WE ALL FALL ASLEEP, WHERE DO WE GO?'부터 최근 어쿠스틱 버전 'Guitar songs'까지 넘나들며 기승전결의 무대를 꾸몄다. 그의 프로듀서이자 친오빠 피니어스 오코넬(기타와 건반), 드러머 앤드류 마샬이 음반 원곡의 악곡을 다이나믹한 록 사운드 특유의 스케일 큰 음향으로 증폭시켰다.
 
시작부터('Intro'-'Bury A FRIEND') 빨간색 조명 아래 이모랩(emo rap·내면의 어두움을 담아 흘리듯이 발음하는 랩)은 무대 정경을 아예 그로테스크한 영화 장면으로 바꿔놨다. 백색 공간과 보랏빛 염색머리, 눈에서 시종 흐르다가 얼굴 전체로 번져가는 핏물…. 공포극, 몽유병을 연상시키는 영상 뒤로 밤 안개 같은 음성을 쏟아내며('When the Party's Over'), 관중들을 일순간 숨을 멈추게 했다가도, "모두 앉았다가 점프하자"는 소통으로('Oxytocin') 개구리처럼 튀어오르게도 만들었다.
 
객석에서 즉석으로 건네 받은 태극기를 쫙 펴는 퍼포먼스('BELLYACHE'-'OCEAN EYES')로 광복절을 맞은 한국 팬들과 호흡하기도 했다.
 
"4년 전 오늘 밤(8월15일), 한국 공연에 왔던 것을 기억해요. 오늘 반응도 정말 놀랍군요. 오늘 이 룸(공연장)에 오신 모두를 사랑합니다."
 
공연 말미, 'Lost Cause' 순서 땐, 화면에 바다 거북 같은 해양 생물의 위기, 지구 온난화와 기후변화에 관한 메시지를 던졌다. "우리의 행성 지구에 대한 보호가 필요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 서로를 보호할 필요도 있습니다. 가족, 친구, 모든 사람들, 그리고 여기 모인 자랑스러운 모든 분들, 서로 서로." 마지막 곡 'Happier Than Ever'의 어둡고 축축한던 선율이 후주 록으로 증폭될 때, 왜 그가 세계를 관통하는 코드로 자리잡고 있는지 납득하게 됐다.
 
고척돔은 통상 '록의 무덤'이자 '동굴 음향'이라 불린다. 높은 돔 천장의 특성상 울림 현상이 종종 발생되는 특유의 고질적인 음향 문제 때문이다. 지난 2019년 아일랜드 록 밴드 43년 만의 U2 공연에서마저 드럼과 베이스의 리듬 파트가 상대적으로 센 멜로디 파트에 묻혀 아쉬움을 토로하는 목소리들도 나왔다. 그러나 빌리의 이번 공연에선 무대 쪽 전면 배치 외에 높은 천장에다 엘어쿠스틱스(L-Acoustics) 사의 K시리즈(K1, K2) 스피커 뭉치들(묶음당 10개)을 11개 정도 매달아 아예 위에서 아래로 소리를 직사하는 방식을 취했다.
 
본보 기자가 공연 프로덕션 관계자에 취재한 결과, 마룬5 내한 당시 음향 엔지니어를 맡은 매튜 맥콰이드가 따라 붙었다. 관계자는 "맥콰이드와 서울음향, 한국 엔지니어 협업으로 고척돔 사운드의 단점을 보완하고자 했다"며 "고척돔의 일반적인 스피커 배열을 탈피해 전과 다른 딜레이 음향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15일 저녁 8시, 서울 구로구 고척스카이돔에서 두 번째 내한 단독 공연을 연 빌리 아일리시. 사진=현대카드
 
영상과 사운드 간 절묘한 조화를 이룬 빌리의 공연 다음날인 16일 저녁 8시,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 마스터카드홀에서는 또 다른 세련된 브리티시 록 음악이 울려 퍼졌다. 1500여명이 몰린, 영국 레스터(Leicester) 출신 얼터너티브 록 밴드 '이지 라이프(Easy Life)'의 첫 내한 무대.
 
2017년 싱글 '포켓스(pockets)'로 데뷔한 이지 라이프는 영국에서 주목 받는 신예다. 매년 주목할 만한 차세대 뮤지션을 선정하는 'BBC 사운드 오브 더 이어(Sound of the Year) 2020' 2위를 차지한 팀. 미카, 아델, 샘 스미스, 에드 시런 등이 거쳐간 프로그램이다. 영국 'NME 어워즈(Awards) 2020'에서 최우수 신인 UK 아티스트상(Best New British Act) 등을 수상했다. 영국 글래스톤베리, 미국 코첼라 등 대형 페스티벌 무대에도 서오고 있다.
 
기타(루이스 베리)와 키보드(조던 버틀즈)의 멜로디 파트, 베이스(샘 휴이트)와 드럼(올리버 캐시디)의 리듬 파트가 균형있게 조화를 이루는 이들의 음악은, 영국 그 자체의 록 감성은 아니다. 랩과 노래 사이 지점을 부지런히 오가는 보컬 머레이 메트레이버스의 힙합·소울풍 소리는 빌리와는 다른 지점에서 '세련된 록 미장센'을 일으킨다. 캘리포니아의 청명한 하늘과 노을, 흐물거리며 뭉개지고 번지는 달리의 시계 그림 같다.
 
공연장 앞에서 만난 한 20대 관객은 "유튜브 플레이리스트를 보면서 대표곡들을 알았고, 5년 전부터 좋아했다"며 "소울과 힙합을 세련된 느낌으로 섞어낸 요즘 스타일의 록 음악들은 일하거나 공부하면서도 듣기 좋다. Z세대가 이런 음악에 빠지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라고 했다.
 
16일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 마스터카드홀에서 열린 영국 레스터(Leicester) 출신 얼터너티브 록 밴드 '이지 라이프(Easy Life)'의 첫 내한 무대. 사진=프라이빗커브
 
이날 공연이 시작하는 순간부터 이들의 음악은 직접 봐야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흰 메리야스 차림에 이빨로 베이스를 켜는 샘과 치던 드럼을 놓고 객석까지 돌진해 관능적인 춤을 추던 올리버, 태극기를 수건처럼 메고 무대를 종횡하는 머레이, 자유분방한 볼캡과 스트립 패션의 모습들... 다소 단조로운 것 같던 음반의 화성과 악곡 흐름은 연주자들이 직접 무대 위에서 춤을 추고, 악기들을 주무를 때, 역동적인 에너지 형태로 뿜어져 나왔다.
 
무대 아래 원 모양으로 배치시킨 점멸하는 조명 연출도 압권이었다. 노란, 초록, 빨강, 파랑의 색깔을 뿜어내고 자욱한 인공안개 사이로 경쾌하면서도 매끈하고 평온하게 뿜어내는 리듬과 선율의 합은 특정 시공의 경계를 계속해서 허물어댔다.
 
LA 해변 같은 노란 조명 연출의 'Have a great day'를 지나면, 기타와 건반을 치던 루이스가 색소폰을 들고 독주를 펼치고('Sunday'), 통통 튀는 신스음과 앰비언트 하우스 사운드('peanut butter')가 달콤한 쿠키처럼 느껴지는 식.
 
"어제, 서울 야경을 거닐었고 한국식 바베큐를 먹었습니다. 기막히게 멋지고 놀라웠습니다. 여러분들의 함성 소리는 제가 일본에 가더라도 듣지 못할 크기인 것 같습니다. 하하하. (한국말로 전환) 사랑해요. 건배!!!"
 
총 1시간 10분 가량 17곡을 소화하고 마지막 앵콜까지 마쳤으나, 객석은 들이치는 썰물처럼 다시 앵콜 요청을 쏟아냈다. 쭈볏쭈볏 무대에 오른 멤버들의 얼굴에는 '정말 준비되지 않았었다'고 써 있었다. "이번 투어 재앵콜 요청은 한국이 처음입니다. 신곡을 들려드릴 건데, 정말이지 가사가 갑자기 생각 안나네요.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니 더 이상의 요청은 안됩니다!" 곧 발표할 신곡 '포츈쿠키'를 머레이가 단출한 건반 타건과 함께 부를 때, '미처 준비되지 못한' 조명 연출이 뒤늦게 작동하며 곡을 따라갔다.
 
"빌리"와 "이지"를 외치는 20대 관객들, 록은 지금 새 시대를 통과하고 있다.
 
16일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 마스터카드홀에서 열린 영국 레스터(Leicester) 출신 얼터너티브 록 밴드 '이지 라이프(Easy Life)'의 첫 내한 무대. 사진=프라이빗커브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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