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섬 제주에서 바티칸까지-16)모든 걸음마다 평화!

입력 : 2022-10-26 오전 6:00:00
먼 훗날 내리는 비를 나는 알고 있다.
 
오늘도 서슴없이 빗속에 뛰어든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
먼 훗날 내리는 비를 나는 알고 있다.
1번 국도 위에 폭탄이 비 오듯 쏟아지던 날
무명용사의 묘지 한 귀퉁이에 잠들어 있는
그도 훗날 내리는 비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비에 젖어 번져가는 나의 발자국 소리가
그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오늘도 눈 비비며 일어나 키 큰 나무 아래서
젊은이들과 함께 축복의 비를 맞는
그날을 위해 달려야 한다.
 
나는 달리면서는 우비를 입지 않는다. 어차피 비에 젖으나 땀에 젖으나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비에 젖으면 상쾌하지만 땀에 젖으면 쾌쾌한 냄새가 나서 불쾌하다. 그런데 바람까지 심하게 부니 체온이 떨어진다. 뇌경색 환자인 나는 체온이 떨어지면 위험하다. 가게에 들어가서 1회용 우비를 사서 배꼽 위 10cm를 쏭당 가위질을 하고 입었다. 심장 부분만 체온 유지를 하는 궁여지책이었다.
 
찢어진 비닐 쪼가리를 입고 빗속을 달리는 내 모습이 안타까워 보였던 모양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던 할머니가 옆으로 다가오더니 시꺼먼 하늘을 가리키며 나를 막 나무란다. 나는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로 알아들었는데 내가 왜 우비를 쏭당 가위질을 해서 입었는지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난처한 나는 가던 길을 계속 가고 있었다. 안 보이던 할머니가 다시 쫒아왔다. 우비를 가게에서 사온 것이다. 다시 시커먼 하늘을 가리키며 입으라고 막무가내이다. 나는 사양했지만 억지로 떠넘겨서 받아가지고 유모차에 넣었다. 그 할머니 화가 나 내 어깻죽지를 한 대 갈기며 빗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좀 달리는데 한 젊은이가 또 내게 달려온다. 그의 손에는 우비와 빵이 들려있었다. 이번에도 나는 설명할 방법이 없어서 조금 전 할머니에게 받은 우비를 꺼내 보여주고 우비가 없어서 안 입는 것이 아닌 것을 설명하는데 성공했다. 그럼 빵이라도 받으라고 해서 빵을 받고 “깜언!”하고 두 손을 모았다. 빗속을 뛰어가는 모습이 꽤나 불쌍해 보였나보다. 그런데 오후가 되어 바람이 더 세차게 불고 기온이 더 떨어져 결국 할머니가 준 우비를 꺼내 입지 않으면 체온이 떨어져 자칫 위험해질 상황이 벌어졌다. “할머니, 깜언!”
 
마침내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 왕조(1802~1945)의 수도였던 ‘후에’에 도착했다. 예전에는 ‘평화의 도시’라는 뜻의 딴 호아(Than Hoa)로 불리기도 했던 후에에는 이끼 낀 옛 왕궁만이 해자에 둘러싸인 채 휑하니 서있었다.
 
16세기 후반 응우옌 왕조와 쩐 왕조가 각각 남과 북을 차지하였고 오랜 시간 동안 대립하였다. 19세기 초 응우옌 왕조는 남쪽의 캄보디아 영토이던 지금의 호찌민 시가 있는 메콩 강 유역의 땅을 프랑스의 도움으로 차지하여 오늘날 베트남 영토의 모습을 형성하였다. 그런데 세상의 공짜가 어디 있겠는가? 신라가 당나라의 도움으로 삼국통일한 역사와 비슷하다. 이후 그 대가로 프랑스 제국주의에 주권을 빼앗기고 식민지의 나락으로 빠졌다.
 
내가 이 도시에서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은 이낀 '낀' 왕궁, 빛바랜 옛 영광이 아니라, 틱 낫 한 스님의 체취가 서려 있을 '뚜 히에우' 사원이다. 꼭 살아계실 때 뵙기를 갈망했지만 올 1월에 열반에 드시고 말았다. 갈등과 대립, 분열이 점점 극으로 치닫는 작금의 시대 상황을 생각할 때 그의 입적은 깊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베트남의 사찰에는 부처님만 있지 않고 법당 옆에 모신을 모신 푸라는 건물이 있고, 입적한 그 절의 주지스님을 모시는 나또라는 공간이 있다. 그의 영정 사진은 천진난만한 어린왕자의 모습이었다.
 
틱 낫 한 스님은 티베트 망명정부를 이끄는 달라이 라마와 함께 생불로 불렸다. 그는 선승이며, 시인이며, 사상가이며, 전쟁의 부당함을 전 세계에 알리며 종전운동을 벌인 평화운동가이다. 그는 진정한 평화운동가로서 베트남 전쟁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갈 때 당신께서 몸소 시체를 거두면서 ‘세상에 진정한 평화가 와야 된다.’는 원력을 세웠다. 
 
그는 조용히 정원을 가꾸고, 가르침과 수행을 펼치면서 100권이 넘는 책을 저술한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며 환경운동가이다. 그는 내게 영혼을 울려주는 시처럼, 음악처럼, 종소리처럼 법문을 들려주는 이야기꾼이며 영적 스승이다. 그는 내가 원불교를 만나기 전 어떻게 부처를 만날 수 있는지 가르쳐주었고 부처를 만나면 어떻게 대하여야할지 가르쳐주었다.
 
그는 1961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초청으로 펠로우쉽 장학금으로 공부를 하며 강연하였다. 1966년 두 번째 미국 방문했을 때는 전쟁의 원인 제공자 미국 정부에 5개 항목의 평화제안서를 발표하였다. 이것은 북베트남 정권의 심기를 건드려 이후 조국 베트남에 돌아가지 못하였다. 귀국을 허락 받은 것은 늘고 병들은 다음이었다. 그는 고향인 후에의 뚜 히에우 사원에서 말년을 보냈다.
 
“석 달만 다녀오려고 떠난 여행이었습니다. 베트남 전쟁의 피해와 부당함을 알리려면 직접 전쟁 당사국인 미국에 가서 그 곳 사람들에게 호소해야겠다고 떠났습니다. 그 후 40년 가까이 고향을 찾지 못했지요.”
 
그는 3년간 미국에 머무르면서 마틴 루터 킹 목사, 토마스 신부, 대니얼 베리건 신부, 반전 가수 존 바에즈 등과 교류하였다. 세계평화를 위해서 그는 서양에 불교적 평화와 자비 사상을 전하면서 1982년 프랑스 보르도 인근에 명상공동체인 ‘플럼 빌리지’를 만들었다. 그는 명상을 하는 동안 우리가 일상 속에서 고요하고 맑은 눈으로 마음을 모아 생활하도록 격려하셨다.
 
“우리들은 대개 어디론가 가기 위해서 걷습니다. 그러다 보면 걷는 이 순간은 사라지고 오직 목적지만이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걷는 것은 그 자체로 중요합니다. 어디엔가 도달하기 위해서 걷는 것이 아니라 걸어가는 발걸음 한걸음마다 평화로움을 채울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무엇이 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아름다운 순간순간을 즐길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의 축복입니다.”
 
평화는 내딛는 발걸음에 이미 있다. 발걸음에 간절한 마음 실리고, 간절한 소망 안고 이렇게 달리면 발자국마다 꽃무늬로 바뀔 것이다. 나는 평화를 찾기 위해서 세상에게 제일 먼 길을 달렸다. 하지만 틱 낫 한 스님은 ‘평화는 바로 여기 지금,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가 하는 일, 보는 일 모든 것에 깃들어 있다,’고 설파하셨다. 다른 건 몰라도 ‘바로 지금 내가 하는 일, 평화를 찾기 위해서 달리는 일’에 평화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나는 달리는 일에 오늘도 기쁨으로 최선을 다한다.
 
강명구 평화마라토너가 베트남 현지 평화달리기 24일차인 지난 24일 베트남에서 비를 맞으며 달리고 있다. (사진=조헌정 목사)
 
강명구 평화마라토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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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