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충범 기자] '블랙기업(Black Company)'. 일본에서 유래된 이 용어는 위법·편법적 수단을 동원해 근로자에게 노동 착취를 강요하는 악덕 기업을 뜻합니다. 블랙기업은 일반적으로 근로자들의 장시간 초과 근로 요구 및 인격 침해를 일삼고, 탑다운 방식의 일방향 소통 구조와 경우에 따라서는 구성원들의 의견 개진 자체를 막는 폐쇄적 행태 등을 보이는 것이 특징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간 '장시간 근로', '끼임 사고', '노조 파괴' 등 반사회적 행태로 도마 위에 오른 SPC그룹이 블랙기업 요건에 부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요. SPC와 같은 블랙기업은 국민들에게 반기업 정서를 키울 뿐 아니라 중장기적으로 해당 산업의 동력이 저하하는 요인이 된다는 점에서, 끊임없는 사회적 감시와 비판이 요구됩니다. 이에 <뉴스토마토>는 SPC 전반의 블랙기업 행태에 대해 진단하고 조명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보석 석방 4개월 만에 미국행 오른 허영인 회장
SPC그룹이 블랙기업으로의 이미지가 굳어진 데는 최고 수장인 허영인 회장이 그간 자주 보여준 비상식적이면서도 비윤리적인 행보와도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그룹 내에서 가장 모범을 보여야 하는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그간 반사회적 문제들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허 회장은 최근에도 본인의 병력과 관계된 이중적 행태를 보이며 논란의 중심에 섰습니다.
17일 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20일(현지시간) 허영인 회장과 장남인 허진수 사장은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했습니다. 허 회장은 미국 의원들을 만나 네트워크 강화와 현지 경제 협력 방안을 논의했는데요. SPC가 미국을 비롯한 글로벌 시장 공략을 강화하는 시점임을 감안하면, 외견상으로 허 회장의 미국행은 큰 문제가 없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2019년 6월 30일 그랜드 하얏트 호텔에서 열린 한국 경제인 간담회에서 국내 주요 그룹 총수들과 대화하고 있는 모습. 오른쪽에서 2번째가 허영인 SPC그룹 회장. (사진=로이터/연합뉴스)
하지만 허영인 회장이 보석 석방된 특수한 신분에 놓여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보석 석방자는 출국 또는 3일 이상 여행 시 법원에 미리 신고해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요. 이에 허 회장은 이번 미국 출장을 위해 지난달 8일 법원에 해외출장 허가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허영인 회장이 이 같은 특수 상황에 놓인 것은 지난해 4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동조합법)'을 위반한 혐의로 구속기소됐다가 5개월 만인 같은 해 9월 보석으로 석방됐기 때문입니다.
작년 4월 허 회장은 지난 2021년 2월부터 2022년 7월까지 민주노총 소속 조합원 570여명을 상대로 노조 탈퇴를 종용하는 등 노조에 개입한 혐의로 기소된 바 있습니다. 아울러 민주노총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승진에서 탈락시키는 등 인사 불이익을 주도록 지시하고, 한국노총을 통한 사측 대변 인터뷰 및 성명서 발표 혐의도 받았는데요.
이후 지난해 7월 법원은 허 회장의 보석 청구를 한차례 기각했고, 9월에서야 요청을 받아들이며 보석 석방 조치를 내렸습니다. 법원에 따르면 그에게는 앞서 언급한 해외출장 허가를 비롯해 공판 출석 의무, 증거인멸 금지, 사전 관계자들과의 접촉 금지 등이 보석 지정 조건으로 달려 있습니다. 자유의 몸이라지만 이행 단서가 붙어 완벽한 자유의 몸이라 보긴 어려운 셈이죠.
한 재계 관계자는 "통념적으로 기업 수장은 보석으로 석방되면 상당 시간은 자숙하는 시간을 갖기 마련"이라며 "트럼프라는 인물의 중요도를 감안해도 보석 석방된 지 4개월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 미국 출장길에 오른다는 것은, 허영인 대표가 세간의 비판적 인식을 얼마나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인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대목"이라고 말했습니다.
해외 업무 수행 불가능한 몸 상태…석방 후 반전
보석 석방 신분으로 트럼프에게 한달음에 달려간 자체보다도, 수사부터 이번 방미까지 허 회장의 일련의 행보에서 모순점이 발견되는 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허영인 회장에 대한 수사는 지난 2023년 10월로 거슬러 올라가는데요. 당시 검찰은 허 회장의 사무실을 압수수색하기 시작, 본격 수사를 6개월가량 진행한 바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허 회장은 검찰로부터 총 5차례 출석을 요구받았지만, 4번은 업무 일정을 이유로 들며 불출석했습니다. 그나마 작년 3월 유일한 출석에서도 가슴 통증을 호소하며 1시간 만에 조사가 종료되기도 했습니다. 결국 검찰은 허 회장이 조사 자체에 제대로 응하지 않는 것으로 판단, 체포를 통해 신병을 강제로 확보하기에 이릅니다.
체포 당시 SPC그룹은 입장문을 통해 "허영인 회장이 75세의 고령인 데다 검찰 출석 조사 중 병원으로 후송된 경험이 있다"며 "공황 발작 및 부정맥 증상 악화 가능성이 높다는 전문의의 소견을 보였다"는 해명을 내놨습니다. 특히 SPC는 입장문에 "해외에서의 업무 수행이 불가능해 국내에서 어렵게 (이탈리아 파스쿠찌사와의) 협약식 일정을 잡았다"는 표현도 명시했습니다.
이후에도 허 회장은 "불면증과 불안 증상이 반복돼 공황장애 약을 먹고 있고, 스트레스로 인해 심장에 이상을 느끼는 때가 있다"며 "갈수록 먹는 약 종류가 늘어나 불안하다"고 강조하며 지속적으로 보석을 호소했습니다.
특히 허 회장 변호인은 지난해 9월 보석 심문에서 "허 회장은 75세의 고령으로 5개월 넘게 구금 생활을 하고 있다"며 "형사 처벌 전력이 없다는 점을 고려해 달라"고 재판부에 호소하기도 했는데요.
이 당시까지의 허 회장 주장대로라면 고령에 공황장애로 인한 극심한 스트레스로 해외여행은 고사하고 일상적인 생활도 쉽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보석으로 제한적이나마 자유의 몸이 된 허영인 회장은 불과 3개월 후인 작년 12월 일본 기업과의 제빵 기술 협의를 이유로 일본 해외 출장길에 오르며 수사 과정 때와는 사뭇 상반된 몸 상태를 보였습니다.
특히 지난달 허 회장이 트럼프의 초정으로 미국 출장길에 오르면서 허 회장의 건강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는 더욱 거세졌는데요. 아무리 직항에 비즈니스석을 이용한다 해도, 서울에서 워싱턴DC까지 걸리는 항공 시간은 15시간 안팎이 소요됩니다. 이 정도면 특별한 질병 없는 젊은 이용객이라 해도 매우 고된 항공 일정임에 분명한데요.
결국 허영인 회장의 건강 상태는 그가 그간 주장해온 것만큼 나쁘지 않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립니다. 이는 SPC 측이 수사 과정에서 이들 병력으로 인해 허 회장이 해외에서 업무 수행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내놓은 것과 정면 배치됩니다. 3~4개월 내 허 회장이 해외를 드나들 정도로 회복 가능한 건강 상태임을 감지했다면, 지난해 9월 법원의 판단도 분명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허 회장이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무릅쓰고도 기업 발전을 위해 출장길에 올랐다는 의미가 되는데, 이 역시 설득력이 떨어지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허 회장이 상황에 맞게 질병을 활용하는 '이중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시각이 더 합리적이죠.
SPC그룹 측 역시 허 회장의 건강에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이는 지난해와는 사뭇 상반된 입장인데요. SPC그룹 관계자는 "(허영인 회장은) 현안이 많아서 해외 출장을 간 것"이라며 “(허 회장의) 건강이 고령 등 이유로 물론 안 좋기도 하지만, 2차 보석 석방 당시에는 건강이 주된 요인은 아니었다. 병원에 입원할 만큼 중대한 병환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김충범 기자 acechung@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