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K금융)⑧"한국계 지상사 의존 안돼"

주재원들, 로컬 고객 공략 고군분투

입력 : 2025-03-14 오전 6:00:00
 
(세부=이종용 기자) 해외시장에서 활로를 찾으려는 금융사에게 필리핀 등 아세안 국가는 '기회의 땅'으로 불립니다. 높은 경제성장률에 비해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보기술(IT)과 글로벌 기준의 금융 시스템을 가진 우리나라 금융사가 진출한다면 곧바로 회사의 이익에 기여하는 성과를 얻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앞서는 것도 사실입니다.
 
국내 금융사의 해외시장 진출 전략은 크게 두가지로 나뉩니다. 사무소·지점을 설립한 후 법인으로 전환하는 전통적 전략이 있고, 현지 금융사를 인수하거나 합작법인을 세우는 방식이 있습니다. 사무소와 지점 설립 방식은 대형화와 현지화에 한계가 있고, 인수합병의 경우 부실 금융사를 떠안을 리스크가 있습니다.
 
필리핀에 진출한 국내 은행에서는 몇 안되는 한국 주재원들과 수십명의 현지인 직원이 같이 일을 하고 있다. 최성현 우리웰스뱅크 법인장이 주재원들을 소개하고 있는 모습. (사진=뉴스토마토)
 
모회사 투자 절대적 부족
 
합작 투자와 법인 설립을 통해 곧바로 현지화에 돌입한 우리은행의 도전은 인상 깊습니다. 우리웰스뱅크는 필리핀에 진출한 국내 은행 중 유일하게 현지화된 법인입니다. 우리은행은 지난 2016년 필리핀 저축은행인 웰스디벨롭먼트뱅크(Wealth Development Bank) 지분 51%를 인수하면서 필리핀에 진출했습니다. 2014년 필리핀이 금융시장을 개방한 이후 외국계 은행이 현지 금융사를 인수한 첫 사례라 주목을 받은 바 있습니다.
 
최성현 우리웰스뱅크 법인장은 "기존 '팔로우 유어 커스터머(Follow your Customer)'부터 시작하는 해외점포 진출의 전략틀을 뒤집는 새로운 형태로 해외 점포 운영하려고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저축은행 업태이다 보니 기업금융이나 방카슈랑스, 신탁 등의 영업 라이센스는 부족하지만 자금 조달부터 디지털뱅킹 전환까지 차근차근 현지화를 진행하는 구조입니다.
 
필리핀 마닐라의 국내 은행 지점장들도 글로벌 금융사, 현지 은행들과 경쟁해야 하는 해외시장에서 지점 형태의 사업 영역은 한계가 있다고 토로했습니다.
 
필리핀에 지점 형태로 진출한 한국계 은행들은 무역금융에 집중하는 동시에 리테일 확장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사진은 필리핀 마닐라의 기업은행 지점. (사진=뉴스토마토)
 
국내 A은행 지점장은 "리테일이냐 기업금융이냐 선택의 기로에서 영업력을 키우려면 현지에서 가동할 수 있는 점포가 많아야 된다"며 "모바일 플랫폼과 같은 비대면 채널이라도 확장해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모회사의 투자 규모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말했습니다.
 
B은행 지점장도 "국내 은행이 현지에서 성장을 하려면 한국 교민과 기업을 상대로만 해서는 안 된다"며 "인도네시아나 베트남 등에서 우리 기업이 대거 진출하는 상황에서 은행도 같이 성장했지만 지속 가능한 수익 구조가 아니다"고 했습니다.
 
C은행 지점장은 "글로벌 업무 연수를 받다 보면 시장 조사의 첫 단계가 한국 대기업의 진출 유무"라며 "국내 은행의 사무소나 지점으로 따라가서 지상사 기업을 지원하고 현지화는 그다음 생각하라는 것인데, 10여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전략"고 지적했습니다.
 
필리핀 마닐라에는 경제·상업지구인 마카티와 BGC에는 현지 은행들과 외국계 은행이 밀집해 있다. 사진은 마카티에비뉴의 퍼시픽스타 빌딩 앞에 금융사 안내 간판. (사진=뉴스토마토)
 
"개도국 인식부터 바꿔야"
 
특별취재팀이 필리핀 현지에 진출한 국내 은행을 찾아가 보면 한국 주재원이 수십명 또는 수백명의 현지인 직원들과 같이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현지 당국의 인허가 조건에 맞추고 현지 고객을 늘리기 위해서도 어떻게 소통하느냐가 관건입니다. 한국만큼 신속하지 않는 업무 프로세스를 어떻게 관리하는지 궁금했습니다.
 
이경록 신한은행 마닐라 지점장은 "필리핀에서 한국 주재원은 소수이고, 현지인은 다수"라며 "현지인이 이상하다고 볼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방인이라는 것부터 인정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지점장은 "한국 처럼 업무 프로세스나 처리 속도가 빠른 나라는 거의 없다"며 "한국이 특이하다는 것부터 인정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문화 차이로 주재원과 직원 간 마찰이 빚어지기도 합니다. 주재원들은 필리핀 직원들이 사과를 잘 하지 않는다며 초반에는 오해를 많이 했다고 말했습니다. 한 관계자는 "필리핀은 서구의 지배를 많이 받다 보니 아시아에 붙어 있지만 서양 문화에 가깝다"며 "잘못을 했으면 일단 사과를 하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지만, 잘못을 시인하면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국내 은행의 필리핀 지점에서 근무하는 한국 주재원들은 현지 직원들과의 화학적 결합을 위해 노력한다. 현지인들이 주요 행사로 생각하는 크리스마스나 생일 파티를 열고 직원 가족을 챙기기도 한다. 사진은 기업은행 마닐라 지점의 직원 휴게실 모습. (사진=뉴스토마토)
 
국민성의 문제가 아니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다른 주재원은 "필리핀 직원들은 영어에 능통하다 보니까 은행 본업 외에 한국 주재원을 수행하는 업무도 많이 한다"며 "그래도 일부 직원들은 한국 상사가 실수로 틀린 표현을 하더라도 찰떡같이 알아 듣고 업무를 수행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오히려 한국 주재원들은 한국 본사의 해외시장 분석 수준이 아쉽다고 했습니다. 일례로 필리핀 강력범죄의 자극적인 언론 보도 등으로 가시눈을 뜨고 시장성에 의문을 품는 것인데요. 필리핀이 7000여개의 섬으로 이뤄지다 보니 숨어든 범죄가가 많고, 한국인이 범죄에 노출되는 사건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한 금융사 관계자는 "최근 5년간 필리핀의 재외국민 사건사고 건수를 보면 중국과 일본보다도 적다"며 "다짜고짜 위험한 곳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씁쓸하다"고 말했습니다. 필리핀을 비롯한 블루오션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냉철하고 객관적인 시장 분석이 우선해야 한다는 조언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9)편에서 계속>
 
세부=이종용 선임기자 yong@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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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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