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숨소리)외톨박이 말똥가리

입력 : 2026-02-24 오후 1:07:44
 
말똥가리가 파주 임진강가 전신주에 앉아 먹잇감을 응시하고 있다.
 
모든 생명이 잠들어 있는 듯한 겨울 들녘, 전신주 위에 홀로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는 실루엣이 있습니다. 화려하지 않지만 단단한 풍채, 소박한 갈색 깃털 속에 날카로운 투지를 감춘 겨울 손님, 바로 말똥가리(Common Buzzard)입니다. 겨울 시린 바람이 부는 논둑길이 더 잘 어울리는 이 소박한 맹금류는 우리 곁에서 겨울의 고요를 함께 견뎌내는 가장 친숙한 이웃입니다.
 
우리 새 이름 중에는 울음소리와 겉 모양의 특징을 잡아서 명명한 이름이 많습니다. 한반도에 서식하는 500여종의 새 중에서 말똥가리는 좀 특이한 이름입니다. 말똥가리는 배 부분이 갈색이고 여기에 넓고 누런 바탕이 따로 있는데 그 모양이 말똥 같아 이름을 지었다고 하고, 일부는 유달리 말똥말똥한 눈을 가져 그런 이름이 나왔다고 보는 이도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말똥가리를 '저광이', '말똥매' 등으로 불렀습니다. 매사냥에 쓰이는 참매나 송골매보다 흔해서 더욱 친숙한 맹금류였습니다. 말똥가리는 과거 멸종위기야생생물 II급으로 지정됐으나, 개체수가 성공적으로 회복돼 2012년 해제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법적 보호를 받는 야생동물입니다.
 
겨울철 충남 서산시 천수만은 맹금류의 낙원입니다. 인적 하나 없는 15만5000㏊의 광활한 간척지에 먼동이 트면 말똥가리의 아침 사냥이 시작됩니다. 먹이가 되는 들쥐, 작은 새들이 많아 자연스럽게 먹이사슬이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수컷이 52㎝ 암컷이 56㎝ 정도 크기의 매목 수리과인 말똥가리는 봄, 여름에는 몽골의 초지에서 번식을 하다가 겨울철에 남하해 한반도 전역에서 활동합니다. 말똥가리는 번식지뿐만 아니라 월동지에서도 각각의 일정한 세력권을 확보합니다. 지난해 A지역에서 월동했다면 그 이듬해에도 똑같은 장소를 찾습니다. 가족 단위가 아닌 홀로 생활을 하며 한 개체가 갖는 세력권은 반경 1㎢ 정도입니다. 이 세력권 안에 다른 말똥가리가 찾아오면 바로 세력다툼이 발생합니다.
 
말똥가리는 황조롱이, 올빼미, 수리부엉이처럼 인간에게 해로운 쥐들을 소탕해 줍니다. 그들은 30m 안팎 거리에 있는 쥐의 일거수일투족을 세밀하게 관찰할 정도로 시력이 발달해 있습니다. 시력이 좋을 뿐만 아니라 사람이 감지할 수 없는 색깔까지도 구별합니다. 기류를 타고 선회하다가 점차 하강해 약간의 정지비행을 하다가 먹이를 발견하면 날개를 반쯤 접고 곧장 내려와서 날카로운 발톱으로 움켜쥡니다. 그러나 사냥술은 매나 황조롱이보다 뛰어나지 못해 성공률이 상대적으로 떨어집니다. 종종 죽은 동물의 사체도 먹으며, 참매가 사냥한 먹이를 빼앗기도 합니다. 말똥가리가 하늘을 빙빙 돌고 있으면 그 아래 참매가 사냥에 성공해 먹이를 먹고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말똥가리가 강원 철원평야에서 자신의 먹이를 가로챈 까마귀를 위협하고 있다.
 
말똥가리에 가장 귀찮은 존재는 텃새인 까치나 까마귀입니다. 까치나 까마귀는 자신의 세력권 안에 낯선 맹금류가 나타나면 근처의 동료들을 모두 불러 집단으로 공격합니다.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을 보유한 말똥가리도 집단으로 덤벼드는 까치, 까마귀에 속수무책입니다. 비행술이나 몸놀림도 이들보다 유연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이 가까이서 괴롭히면 스스로 피해버립니다.
 
번식지인 몽골의 먹이 조건이 좋으면 독수리처럼 번식률이 높아져 그해 겨울에는 한국을 찾는 개체수도 늘어납니다. 말똥처럼 흔했던 말똥가리도 이제는 그 개체수가 급격히 줄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맹금류가 그러하듯 생태계 먹이사슬의 상위 포식자들은 멸종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하위 체계가 무너진 상태에서 상위에 존재하는 맹금류는 존립할 수 없는 것이 자연법칙입니다. 이들의 먹이가 되는 작은 새, 설치류, 양서파충류가 점차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똥가리는 화려한 수식어보다는 '익숙함'이라는 단어가 더 잘 어울리는 새입니다. 삭막한 겨울 들판을 묵묵히 지키는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며 살아가는 우리네 삶과도 닮아 있습니다. 올겨울 무심코 지나쳤던 시골길 전신주 위를 한 번만 더 눈여겨봐 주세요. 그곳엔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묵묵히 봄을 기다리는 외톨박이 말똥가리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글·사진=김연수 한양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겸임교수 wildik0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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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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