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규하 정책선임기자] 한국경제, 지금 어디쯤 와 있을까요.
요즘 경제를 생각하면 머릿속에 맴도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성장률이 올라간다", "경상수지 사상 최대 흑자 전망", "반도체 호황", "소비가 회복 흐름이다", 심지어 '코스피 6000'까지 연신 놀랄 놀자입니다.
이런 소식만 들으면 한국경제가 다시 힘을 받는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수출은 반등했고 주식시장도 나쁘지 않습니다. 반도체 기업들은 실적을 개선하며 경제를 이끄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올해 성장률도 2%대로 상향 전망되고 경상수지는 1700억 달러에 달하는 역대급 흑자를 예상하고 있습니다.
숫자만 보면 분명 나쁘지 않습니다.
27일 서울 중구 하나은행 딜링룸 전광판에 코스피 등 종가가 나타나있다. (사진=뉴시스)
그런데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다른 온도차를 볼 수 있습니다. 수출·주가가 오르는 것과 서민들의 체감 경기가 좋아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니까요. 거시 지표와 내수 지표, 자본 흐름을 함께 놓고 보면 아직 민생으로 온기가 충분히 번지지 않았다는 신호를 읽을 수 있습니다.
겉은 화려해지고 있는데 속은 조심스러운 상황, 바로 '지표의 역설'입니다.
'반도체' 단일 업황에 '저당'
최근 원·달러 환율이 1400원 중반대에서 쉽게 내려오지 않고 있습니다. 단순히 미국 금리가 높아서라고만 보기에는 설명이 부족합니다. 시장에서는 우리 경제의 기초체력, 즉 펀더멘털에 대한 신뢰가 예전 같지 않다는 해석도 나옵니다. 통화주권이 약해지고 있다는 신호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과거에는 경상수지 흑자가 늘어나면 원화가 강세를 보이는 게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역대급 흑자를 이야기하면서도 환율은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결국 구조의 문제입니다. 우리 경제가 반도체 한 산업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글로벌 인공지능(AI) 투자 심리가 흔들리거나 반도체 주가가 조정받으면 원화도 함께 흔들립니다. 국가 전체의 생산성과 경쟁력보다는 특정 산업의 사이클이 통화 가치에 영향을 미치는 구조가 돼버린 겁니다.
예를 들어 글로벌 투자자들이 엔비디아(NVIDIA) 같은 미국 기술주를 팔기 시작하면 국내에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서 외국인 자금이 빠져나갑니다. 주식을 팔고 달러로 바꾸는 과정에서 원화 매도가 늘고 환율은 오릅니다.
한국 화폐 가치가 국가 전체의 생산성이 아닌 특정 산업의 경기 사이클에 종속되는 등 우리나라의 경제 구조가 '반도체' 단일 업황에 저당 잡혔다는 방증입니다.
수출 구조를 들여다보면 이런 특징은 더욱 뚜렷합니다. 지난달 반도체 수출액은 역대 평균의 두 배를 상회하는 등 전체 수출의 30%를 돌파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제외한 12대 주력 산업은 2011년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1월1일 부산 남구 신선대에서 컨테이너 선박들이 줄지어 정박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반도체의 경쟁력은 분명 우리의 자산이지만 화려한 반도체 지표에 가려진 'K-산업의 빙하기'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한 산업의 성과가 경제 전반의 활력으로 충분히 확산되지 못한다면 구조적 편중은 장기적 리스크로 변질됩니다.
실질 일자리를 만들고 내수를 지탱하는 여타 제조 산업들이 이미 '빙하기'에 진입하는 등 산업 간 양극화가 경제 전반의 낙수효과를 차단합니다. 반도체 수지만을 떼어놓고 보면 나머지 산업 분야는 사실상 무역 적자 구조를 면치 못하고 있는 불안한 외줄타기 신세입니다.
반도체 외줄이 끊어질 경우 속수무책으로 얼마나 추락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경계감이 요구되는 대목입니다. 자산시장 특성상 상승의 과실도 보유 지분 규모에 따라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주가가 오르면 대규모 지분을 가진 주주의 평가이익은 빠르게 확대되는 반면 소액 투자자의 수익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일 수 있습니다. 코스피 6000선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미소만 생각나는 건 왜 일까요. 자산시장에서는 투자의 규모가 수익 속도를 결정하기 때문이죠.
월급쟁이 실질소득과 가계 여력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시장의 환호와 체감 경기 사이에는 간극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성장이 민생으로 흐르지 않는 이유는 가계의 실질 구매력 하락과 궤를 함께합니다.
지난 23일 서울 중구 서울역에서 직장인들이 이동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실질 가처분 소득은 '20년째 정체'
통계상 가구 소득이 소폭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물가 상승률과 비소비지출(이자 비용 등)을 반영한 실질 가처분 소득은 20년째 정체를 맞고 있습니다. 가계의 지갑이 조금씩 열리고 있지만 쓰임의 폭은 넓지 않은 것은 비필수 지출 감소가 말해줍니다.
지난 20년간 한국의 가계부채는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가처분 소득 대비 부채 비율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치솟는 등 소득에서 원리금 상환액을 뺀 '실질 여유 자금'은 2000년대 초반 수준에서 큰 변화가 없거나 오히려 줄어든 구간이 많습니다.
가계소득의 큰 축인 사업소득은 더욱 심각합니다. 자영업자 1인당 실질 판매액이 IMF 외환위기 당시보다 낮다는 통계는 자영업 가구의 가처분 소득이 20년 전보다 사실상 후퇴했음을 의미합니다. 20년 전과 비교해 소득에서 세금, 사회보장기여금(연금·보험), 이자 비용이 차지하는 비중이 현격히 높아졌습니다. 이는 월급봉투가 두꺼워졌어도 통장을 스쳐 지나가는 돈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뜻입니다.
전체 평균 소득도 반도체 등 수출 대기업 종사자들의 소득 증가로 인해 소폭 우상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위 20%(1분위) 등 서민층의 소득은 정체된 반면 주거비와 교육비, 이자 부담이 급증하면서 전체적인 가처분 소득의 질을 악화시켰습니다.
지난 2월19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네거리에서 시민들이 이동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더 우려스러운 점은 대외 리스크에 대응할 우리의 '내성'이 약해졌다는 사실입니다. 글로벌 AI 거품론이 고개를 들 때마다 우려스러운 요동과 수입 물가 상승, 고금리 유지라는 부메랑은 삶을 더욱 옥죄는 악순환을 만듭니다.
반도체 호황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자금이 다시 산업 생태계 전반으로 흘러들게 하는 '복원력'과 실효적 민생 물가 잡기 '총력', 실질 가처분 소득을 끌어올리는 '구조적 개혁'이 필요할 때입니다. 한국경제는 위기의 한복판에 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산업 편중, 통화 변동성, 실질소득 정체, 가계부채 부담이라는 과제가 병존하고 있는 겁니다.
낙관과 비관 중 어느 쪽을 택하느냐가 아닌 화려한 지표에 가려진 구조적 문제를 얼마나 신속히 풀어내느냐에 대한 본질입니다. 경제의 궁극적인 평가는 단순한 숫자보단 삶의 안정에서 이뤄져야합니다.
지금 '민생 경고'라고 말하는 건 위기보단 균형을 요구하는 메시지로 봐야합니다. 화려함 뒤의 냉기를 직시할 때 비로소 단단한 회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규하 정책선임기자 judi@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