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재영 기자] 2023년 자본시장을 뒤흔든 ‘영풍제지 주가조작 사태’의 민사상 책임 소재를 가리는 고등법원의 최종 판단이 임박했습니다. 이번 재판은 증권사가 시세조종 의심 계좌에 취한 출금고 정지 조치가 정당한 방어권인지, 아니면 과도한 재산권 침해인지를 가리는 최초 사례입니다. 이에 따라 판결 결과는 향후 증권업계 리스크 관리의 핵심 가이드라인이 될 전망입니다.
8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서울고등법원 제18-3민사부(나)는 최근 영풍제지 사건 계좌 명의인 A씨가 키움증권을 상대로 제기한 ‘출금고정지조치 무효확인 청구의 소’ 항소심 변론을 종결하고 오는 5월29일 판결을 선고하기로 했습니다.
영풍제지 사태는 주가조작 세력이 약 1년여간 시세를 조정해 6000억원대 부당이득을 챙기고, 이 과정에서 키움증권 한 곳에서만 약 5000억원의 미수금이 발생한 대형 금융사고입니다. 당시 키움증권은 미수금 회수와 범죄 확산 방지를 위해 의심 계좌들의 자산을 동결했는데, 이번 소송은 바로 그 동결 조치의 적법성을 묻는 법적 공방입니다.
그동안 주가조작 관련 법리는 주로 증권사가 이상 거래를 인지하고도 방치해 타인에게 손해를 입혔을 때 그 책임을 묻는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선관의무)’ 위반 여부에 집중돼 왔습니다. 하지만 이번 재판은 증권사가 범죄 예방과 채권 보전을 위해 확정판결 전 고객의 자산을 임의로 동결할 권한이 있는지를 직접적으로 묻고 있다는 점에서 결이 다릅니다.
원고 A씨 측은 항소심 변론에서 키움증권 역시 낮은 증거금률을 유지하며 시세조종을 용이하게 한 ‘공동방조자’의 지위에 있다고 지적하며 역공을 펼쳤습니다. 증권사가 자신의 과실로 발생한 미수금 손실을 보전하기 위해 기소조차 되지 않은 고객의 별개 휴면계좌까지 동결하는 것은 민사상 ‘인과관계’가 결여된 부당 행위라는 주장입니다.
특히 A씨 측은 출금이 정지된 계좌가 실제 시세조종 행위에 사용된 계좌와 다르다는 점을 법리적 허점으로 찔렀습니다. 설령 다른 계좌에서 문제가 발생했더라도, 범죄행위와 무관한 별개의 자산까지 포괄적으로 동결하는 것은 자본시장법상 투자자 보호 의무를 저버린 권한 남용이자 과잉 조치라는 논리입니다.
반면 키움증권은 계좌 명의인이 세력에게 계좌를 빌려준 행위 자체를 미필적 고의에 의한 ‘불법행위 방조’로 보는 기존 판례를 근거로 맞서고 있습니다. 범죄에 이용된 정황이 명백한 계좌를 동결하는 것은 추가 피해 확산 방지와 채권 회수를 위한 증권사의 정당한 방어권 행사라는 입장입니다.
이번 소송 결과는 현재 키움증권이 진행 중인 다른 소송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입니다. 키움증권은 영풍제지 사태로 발생한 미수금을 보전하기 위해 계좌주 100여명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 및 미수금 청구 소송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비록 소송의 성질은 다르지만, 두 사건 모두 계좌 명의인의 방조 책임 인정 여부라는 쟁점이 일치합니다.
앞서 1심 재판부(서울남부지법)는 무려 20개월간의 장기 심리 끝에 키움증권의 조치가 정당했다며 손을 들어줬습니다. 당시 재판부는 시세조종의 도구를 제공한 측면이 인정된다면, 사고 방지를 위한 증권사의 사후 동결 조치를 무효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특히 1심 기록에는 전자화가 불가능할 정도의 방대한 수사 자료가 포함되어, 명의인들의 책임 범위를 입증하는 근거가 된 것으로 파악됩니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기존 법리는 증권사의 수동적 과실을 묻는 데 그쳤지만, 이번 판결은 증권사가 가진 선제적 통제권의 명확한 경계선을 정해줄 것”이라며 “또다른 주가조작 사태 방지를 위한 증권업계 리스크 관리의 가이드가 될 수 있다”고 내다봤습니다.
이재영 기자 leealive@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