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송종호기자] 눈이 끊임없이 내린다. 온통 하얗게 변해버린 도로위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업고 뛰고, 아들의 여자는 발을 동동 구른다. 도로사정으로 응급차는 오지 못하고, 그렇게 뛰어 병원에 도착했지만 아들은 이미 운명을 달리한다. 그 아들의 딸이 다시 똑같은 상황에 놓였을때 할아버지가 된 아버지는 다시 손녀를 등에 업는다. 그리고 그 손녀는 자신의 연인마저 삼켜버린 눈을 향해 소리친다. "잘지내시나요. 나는 잘있어요! (お元氣ですか。 私は元氣です。)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던 대학1학년 첫 겨울. 영화 러브레터는 인간의 의지로 어쩔 수 없는 인연의 끈을 하염없이 내리는 눈으로 표현한 듯 했다.
특히 인연을 소중히 하고 가볍게 여지기 않는 일본 특유의 온(恩)사상이 돋보이는 영화이기도 했다.
▲ <은퇴대국의 빈곤보고서>
(전영수 지음, 맛있는책 펴냄)
하지만 일본에서 이 인연이 끊어지는 모양이다.
10년이 더 지나 아들과 손녀를 업고 뛰어야만 했던 고령의 아버지가 일본 사회에 많아지고, 홀로 늙어가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더욱 많아진다. 영화처럼 아름다운 모습보다는 고령의 아버지가 쓸쓸히 고독사(孤獨死)하는 경우가 더 많아져 일본의 어두운 현실을 보여준다.
지난해 일본의 공영방송 NHK가 방영해 국민적 관심을 일으킨 "무연사회(無緣社會)"는 최근 일본 국민의 정신적 난맥상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최근 국내 한 일간지가 이를 인용해 한국에서도 담론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은퇴대국의 빈곤보고서>는 일본의 노인빈곤 자화상이다. 물론 문제제기의 출발이 현대 일본의 노인빈곤일 뿐 실상은 사회전체를 관통하는 이슈로 귀결된다.
독신으로 혼자 거주하는 기자에게 독신남성의 대량 고독사를 지적하는 부분은 결코 남일이 아니다. 또 경제지상주의의 그늘로 가족이 붕괴하고 고향을 상실하며, 동료와의 소외를 꼽는 저자의 지적은 이웃나라 특정 세대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기자 출신으로 한양대 겸임교수를 맡고 있는 저자는 지난 1년간 일본 게이오대 방문교수로 재직하면서 직접 목격한 일본의 현실을 전하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실버산업의 천국 등으로 포장돼 있는 일본의 실상은 심각하다. 은퇴 이후 상실감과 소외감, 자괴감 속에 불안한 빈곤노인으로 사는 이들이 많다. 고령자의 3대 불안인 금전, 건강, 고독을 노린 노인 대상 범죄가 늘어나고, 고독과 울분을 참지 못한 노인 범죄 역시 증가추세다.
저자는 비교적 탄탄한 연금 제도에도 빈곤으로 고통받는 일본의 노인들에게 편안한 노후를 위한 국가와 개인의 대책 모색이 시급함을 강조한다.
이에 따라 정치권의 부담도 늘고 있다. 지난 1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한·일 재무장관 회의에서 배석한 마나고 야스시 주계국장(한국의 예산실장)은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에게 “고령화 속도가 매우 빠른 한국은 일본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지금부터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즉 일본은 고령화가 진전되면서 투표권을 가진 고령자가 정책 결정을 주도하는 '연금 민주주의'가 지배해 복지 개혁을 추진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말이다.
마나고 국장은 "일본은 정치권에서 '노인복지' 구호가 나오던 1973년을 복지 원년이라고 하는데, 당시는 몰랐지만 그때가 바로 고도성장기가 마무리되면서 세입 증가율이 꺾이고 고령자를 위한 지출이 증가하기 시작하던 때였다"고 지적했다.
한국의 미래를 즐겁고 넉넉한 풍격으로 스케치하고 싶다면 그 출발은 지금이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은퇴대국의 빈곤보고서는 그 힌트를 제공한다. 일본에 지금 일어나고 곧 우리에게도 닥칠 충격적인 미래가 책에 고스란히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