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형 대법관 퇴임사 전문

입력 : 2011-11-18 오전 11:59:29
[뉴스토마토 최기철기자] 27년 여 전, 처음 법복을 입었을 때 벅차고 떨렸던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이제 그 법복을 벗습니다. 그리고 법관으로서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 자리에 섰습니다.
이런 뜻 깊은 자리를 마련해 주신 대법원장님, 대법관님들과, 참석해 주신 법원장님들, 법관 및 법원 직원 여러분 모두에게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울러 그 동안 저와 인연이 되어 격려와 지지를 아끼지 않았던 선·후배·동료 법관과 법원 가족들, 그리고 친구, 친지들, 이 분들이야말로 제가 오랜 세월 법관으로서 긴 여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큰 은덕을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6년 전 예기치 못한 부름을 받고 대법원에 첫 발을 내딛었을 때는 무거운 책임감에 두려운 마음뿐이었습니다.
6년이 지난 지금은 부끄러움이 앞설 뿐입니다. 처음의 다짐과 소망을 얼마나 이루었는지 생각하니 더욱 그렇습니다.
 
제가 법관으로서 도달하려고 했던 목표는 한가지였습니다. 고통 받는 이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 동안 내린 판단이 누군가에게는 희망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반대로 누군가에게는 실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분들께는 지극히 넓은 혜량을 바랄 뿐입니다.
 
제가 법관으로서 지낸 세월은, 법 안에서 법을 찾아 법을 발견하려 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또 얼마나 많은 일들이 남아 있는지, 직접 경험하고 확인할 수 있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숱한 불면의 시간 속에서 스스로를 괴롭히면서 올바른 판단을 위해 고심을 거듭하고 계시는 많은 법관들이 있습니다. 그 모든 분들에게 마음 속 깊은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드립니다. 홍수처럼 밀려오는 수많은 사건 앞에서 제가 겪었던 번민과 여러분이 겪고 있는 그것이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법관들을 믿습니다. 마치 홍수에 떠내려가듯 일상 속에 함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법을 발견하고 정의를 세우기 위해, 인간의 보편적이고 공정한 가치를 실현하는‘좋은 법관’이 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은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짓과 위선이 난무하는 세상에서는 진실을 찾아내는 것 자체가 정의의 출발입니다. 그러나 실체적 진실이 밝혀졌다 하더라도 올바른 법이 적용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부정의일지는 자명합니다. 사실을 그릇 인정한다면 1인에 대한 부정의에 그칠 수 있지만, 법관이 그릇된 법을 선언한다면 이는 만인에 대한 부정의임을 모를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법관들의 고심은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사회가 법관과 법원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갖고 있다면, 그 사회는 매우 소중한 자산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법관이 내린 판단이 무엇이든, 그것이 내 생각과 같거나 다르거나 나에게 유리하거나 불리하거나 상관하지 않고, 법관이 그것이 정의라고 선언했기 때문에 그것을 존중하고 승복하겠다는 것, 그것이 믿음의 완성입니다.
 
어느 사회가 법관과 법원을 믿지 못한다면, 그것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같거나 유리한 판단에는 고개를 끄덕이지만 자신의 생각과 다르거나 불리한 판단에는 고개를 돌린다면, 법원에 대한 믿음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사회가 법관에게 자신의 생각과 같거나 유리한 판단만이 정의라고 내세우는 사적(私的) 정의를 요구하지 않을 때 법관과 법원에 대한 그 사회의 믿음은 굳건해질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처음부터 사회에게 믿음을 바랄 수만은 없습니다. 결국 우리 사회의 믿음은 법관과 법원이 사적 정의의 요구에 흔들리지 않고 오로지 정의로움을 스승삼아 올바르게 나아갈 때 가능한 일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법관의 독립은 생명과 같습니다. 이것을 잃으면 생명을 잃는 것이니 법관 스스로 이를 지켜내야 합니다. 그러나 법관의 진정한 독립은 법관이 외로이 법과 정의를 제대로 선언하는 책무를 다할 때 지켜낼 수 있다는 생각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의 우리 사회가 법관과 법원에 대해 강한 믿음을 갖고 있다고 말하기에는 조금 부족함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만큼 우리 법관과 법원이 우리 사회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남아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우리 법원은 기꺼이 더 많은 불면의 시간을 보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물론 이 모든 것에 관하여 저희 법관과 법원에 대해 한없는 믿음과 기대를 안고 떠납니다.
‘산에서 나와야 산을 볼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이제 법원을 나서지만, 그럼으로써 법원을 더 잘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한그루 사과나무처럼 법원 사랑하는 마음을 더 크게 키워나가겠습니다. 우리 사회가 법원을 아끼고 믿을 수 있도록 애쓰겠습니다. 법원은 저의 첫사랑입니다. 법관을 마치는 것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생각으로 첫사랑을 지키겠습니다.
 
내내 건강하시고, 안녕히 계십시오.
감사합니다.
 
2011. 11. 18.
김지형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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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