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사랑과 혁명의 공통분모

한중수교 20주년 기념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

입력 : 2012-12-19 오후 5:27:43
[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젊은이들이 대립하고 있다.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어른이 갈려 있으니 아이도 갈려 있다. 혁명에 대한 의지는 똑같다."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의 대명사 <로미오와 줄리엣>을 바탕으로 한 연극인데 첫 대목부터 예기치 못한 대사가 나온다. 극중 배경은 원작의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1968년 중국의 문화대혁명 시대로 바뀌었고, 무대 위에는 광기어린 혁명의 분위기가 흐른다. 여기에다 말하고 연기하는 주체인 배우는 원작과도 개작본과도 국적이 다른 한국인이다.
 
한중수교 20주년을 맞아 국립극장 무대에 오르는 <로미오와 줄리엣>은 우리나라의 국립극단과 중국 국립극단인 중국국가화극원이 처음으로 합작해 올린 연극이다. 영미권 희곡, 중국 연출가, 한국 배우라는 이질적인 조합에도 불구하고 공연은 의례적인 기념공연일 것이라는 기우와는 달리 흥미로운 지점들을 만들어냈다.
 
공연팀은 '사랑'과 '혁명'의 공통분모를 뽑아내 중국 현대사의 거대한 틀 속에 적절히 녹여냈다. 주역인 강필석, 전미도 외에 김세동, 고수희 등 연기력 출중한 한국배우들이 총출동한 덕분인지 문화적 괴리감도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남녀의 사랑' 외에 '두 세력의 첨예한 갈등'이라는 소재는 오늘날 한국관객과도 그다지 멀지 않은 이야기였다.
 
문화대혁명 시대 중국사회의 비극, 그리고 젊은 두 남녀의 비극 사이 공통점은 맹목적이고 극단적이며 고귀하면서도 무모하다는 것이다. 공연은 연인의 사랑과 혁명의 열기를 교묘히 교차시키다가 로미오의 대사를 통해 '반대편을 사랑하는 것은 반동인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을 따르는 중국 젊은 10대들이 일으킨 만민에 대한 전쟁이다. 홍위병이라고 일컬어지는 이들 10대는 마오쩌둥 사상에 반하는 인물이라고 판단되면 서슴지 않고 폭력을 가했다. 이 시기에 가장 격렬하게 대립한 두 세력, 극단적인 '공련파'와 보수적인 '전사파'가 셰익스피어 원작 속 '몬태규가'와 '캐풀릿가'를 각각 대신한다.
 
연출은 중국국가화극원에 소속된 상임연출가 중 한 명인 티엔친신(44)이 맡았는데, 과감한 재해석과 안정된 연출력이 돋보였다. 연출가가 선택한 무대의 중심 개념은 젊은이들의 사랑과 혈기를 상징하는 '비상과 하강'이다. 배우들은 무대 가운데 놓인 경사진 지붕과 곳곳의 전깃줄을 누비며 비상과 하강을 반복한다.
 
독특한 색채감각은 시대적 배경을 느끼게 하는 동시에 극에 세련미를 더했다. 지붕 뒤로 흐르는 회색 하늘과 하얀 구름, 붉은 노을은 무대에 아름다운 깊이감을 선사했다. 무대 양쪽에는 군인 세력을 상징하는 시멘트 건물과 노동자 세력을 상징하는 벽돌 건물을 배치, 당대 두 세력의 대립을 형상화했다. 푸른빛 의상을 입은 노동자 세력과 카키색 의상에 빨간 완장을 찬 군인 세력은 선명한 시각적 대비를 이뤘다.
 
중국연극 특유의 시공간 감각도 엿볼 수 있었다. 시시때때로 지붕 위를 달리는 배우들의 모습은 중국 무협지 속 축지법을 연상시켰다. 라이브 연주와 노래 및 동작을 대사와 동시에 병렬로 진행하면서 공연의 규모감을 더하기도 했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랑에 빠진 로미오와 줄리엣은 문화대혁명 시대에도 결국 원작대로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그런데 이 마지막 장면에서 공연은 한걸음 더 나아간다.
 
영안실에 나란히 누운 두 연인을 두고 양 세력은 분노를 표출하며 격렬한 몸싸움을 벌인다. 싸움을 중지하라는 중앙정부의 명령도 이들의 싸움을 막지 못한다. 그러다가 어른들의 싸움에서 젊은이들이 빠져나와 수신되지 못한 로미오의 편지를 돌려가며 읽고 노래를 부르며 빨간 띠로 눈을 가린다. 사랑과 혁명의 공통점, 즉 아름다운 맹목성을 상징하는 이 장면에서 관객이 아이러니를 느낄 때쯤 극장은 서서히 암흑 속에 잠긴다.
     
작 셰익스피어, 연출 티엔친신, 각색 레이팅, 협력연출 왕팅팅, 번역 홍영림, 윤색 고연옥, 무대 박동우, 조명 김창기, 의상 김지연, 작곡 김철환, 안무 박경수, 소품 정윤정, 분장 최은주, 출연 강필석, 전미도, 김세동, 장성익, 서경화, 김정환, 고수희, 박완규, 조원종, 이재호, 송의동, 조정문, 김은우, 최순진, 김성효, 우정원, 임중혁, 김지훈, 전우열, 홍아론, 이소아, 최민우, 주재희, 옥자연, 29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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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볏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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