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박준서 조정센터장 "돈에 오염된 사회..공격밖에 몰라"

서울법원조정센터 개원 4년, 조정신청 '주춤'.."소송만능주의 탓"
퇴임 대법관들 센터장 맡아주길 기대했지만 "쉬고싶다" 모두 고사

입력 : 2013-04-12 오전 9:31:00
[뉴스토마토 최기철·김미애기자] "우리 사회가 돈에 너무 오염됐다는 생각이 자꾸 듭디다. 돈 밖에 몰라 큰일이에요"
 
박준서 서울법원조정센터장(73·고시 15회·전 대법관)이 지난 4년간 조정센터를 이끌어 온 소회를 이렇게 밝혔다.
 
임기만료를 하루 앞둔 10일 만난 박 센터장의 목소리에는, 불모지에 가까운 우리나라의 민간 민사조정 시스템을 성공적으로 정착시켰다는 기쁨 보다는 안타까움이 배어 있었다.
 
분쟁 조정이라는 법적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 사회 전반에 박힌 뿌리 깊은 문제점을 다시 확인한 데 대한 실망감이 느껴졌다.
 
◇"우리 사회, 싸워서 상대 굴복시킬 생각만"
 
그는 "재판할 때는 잘 못 느꼈는데, 조정을 하면서 우리 사회가 타협과 협상에 익숙치 않다는 걸 알게 됐다. 싸워서 상대를 굴복시킬 생각만 하고 있다"고 재차 안타까워했다.
 
2009년 4월13일 설립된 서울법원조정센터는 개설 한 달 만에 340여건의 조정신청이 접수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개원 1년 기준으로는 총 2217건을 처리했으며, 조정성공률이 50%를 넘는 등 성공적으로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4년이 지난 지금 주춤하고 있다. 박 센터장의 말에 따르면, 개원 초기 조정센터에 직접 신청하는 건수가 한 달에 80건이 조금 넘었지만 현재 수준은 그의 50%정도 증가한 데 그치고 있다.
 
그는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조정을 선택할 수 있도록 홍보도 많이 했지만 잘 안됐다. 타협과 합의 보다는 법정에서 서로를 공격하는 소송을 더 선호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물론 전체적인 조정건수가 줄었다는 것은 아니다. 법원에서 재판하던 중 회부되는 조정건수는 크게 늘었다. 개원 초기 1년에 약 800건이던 것이 지금은 한 달에 약 800건 수준이라고 박 센터장이 설명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당사자들이 조정을 통해 분쟁해결을 시도해보지 않은 채 곧바로 법정으로 달려가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박 센터장은 "재판은 싸움이다. 국가로 치면 전쟁이다. 많은 희생이 따르고 싸울수록 더 크게 번진다"며 섣부른 소송 제기를 우려했다.
 
◇"섣부른 재판, 분쟁에서 헤어날 수 없어"
 
또 "증인들도 위증죄로 휘말리고, 아주 오래 전 일 까지 들춰내 맞소송을 건다"며 "결론이 나도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 뿐만 아니라 진 사람은 물론, 이긴 사람도 깊은 상처를 받아 결국 분쟁에서 헤어날 수 없게 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손자병법의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不戰而屈·부전이굴)'이라는 전술을 예로 들며 "조정은 싸우지 않고 이기되 양 당사자 모두 이기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서로의 이해가 맞닿는 접점을 찾기 위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과정으로, 서로의 양보를 기초로 한다는 것이다.
 
박 센터장은 손해배상청구 사건을 예로 들면서 "1000만원을 청구해서 800만원으로 조정했다고 칠 경우 원고 입장에서는 200만원 손해 같지만, 재판에서 선임하는 변호사 수임료와 시간적 손해 재판과 비교해보면 오히려 이익이다. 피고도 똑 같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조정은 떼쓰는 사람이 이익이고 마음 약한 사람은 손해'라는 선입견에 대해서도 "모르는 소리"라고 잘라 말했다. 각 당사자가 가지고 있는 이해관계를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객관적인 기준으로 조정하기 때문에 '떼'란 통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떼쓰면 이긴다' 조정에선 안 통해"
 
박 센터장은 지난 4년간 2400건의 조정사건을 처리했다. 나머지 7명의 상임조정위원도 비슷한 수준이다. 그는 재판에서는 보기 힘든 해결방법의 유연함도 조정의 장점이라고 소개했다. 그가 직접 중재한 상속 빌딩을 가운데 둔 두 형제의 분쟁조정 사건이 바로 그런 사례다.
 
A, B 두 형제는 아버지로부터 강남에 있는 꽤 규모가 큰 빌딩을 상속받았다. 소유 명의는 아버지의 유지대로 공동명의로 했다. 빌딩에서 나오는 임차료 등 각종 수익은 형제가 똑같이 나누기로 했다. 대신 빌딩의 실질적 관리는 형이 맡았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B씨는 자신 보다 형이 수익을 더 많이 챙기고 있다는 의심을 품게 됐다. 나중에는 자신을 속이기 위해 형이 분식회계까지 하고 있다고 믿게 됐다. B씨는 소송을 낼까도 생각했지만 결국 조정을 먼저 받아보기로 했다.
 
 
박 센터장은 두 형제의 분쟁을 조정하면서 절충안을 냈다. 형이 동생을 속인 증거 등이 없으니 1년 동안 동생이 빌딩을 직접 관리해보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두 형제는 이를 받아들였고 조정은 성립됐다. 형제간 서로에게 불리한 증거를 들이대면서 상처주는 일 없이 매끄럽게 분쟁이 매끄럽게 봉합된 것이다. 재판과정에서 보기 어려운 결론이다. 박 센터장은 "큰 사건이 아닌 한 대부분 사건 해결은 조정이 재판보다 백번 낫다"고 말했다.
 
박 센터장은 조정제도의 활성화가 폭주하는 우리나라의 소송사건 수를 줄이는 데도 기여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의 말에 따르면, 미국은 연방법원 기준으로 민사사건 중 90% 이상이, 일본은 70% 이상이 화해로 끝난다. 특히 미국의 경우 1심에서 판결로 끝나는 사건이 1.5%.정도다. 이에 비해 우리는 민사분쟁 중 소송으로 가는 것이 70%를 넘는다.
 
박 센터장은 "조정은 출산시 자연분만을 시도하는 것과 같다"며 "자연분만을 시도하다가 되지 않을 경우 제왕절개를 하는 것이지, 무턱대고 제왕절개를 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무리가 따른다"고 말했다.
 
◇"조정전치제도 도입하면 재판의 질도 높아질 것"
 
이어 "이런 이치로 민사 분쟁에서도 판결 전 조정을 먼저 실시하는 조정전치주의가 도입되어야 한다"며 "조정을 먼저 거치게 되면 법정으로 가는 소송건수가 확실히 줄어들 것이고 재판의 질도 더욱 높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대법원도 이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현재 조정전치 제도 도입을 검토 중이다.
 
박 센터장은 오랫동안 법조계 문제로 대두되어 오다가 최근에는 공직자 전반으로 번진 전관예우 문제 해결에도 조정제도의 활성화가 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대법원은 두 가지 고민으로 골머리를 앓아왔다. 법관을 통한 조정결정이 강압적이라는 여론과 전관예우의 폐해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 대안으로 나온 것이 민간차원의 조정센터를 만들어 법원에 두자는 것이었다. 사회인으로서도 산전수전 다 겪은 오랜 경력의 변호사들이 조정을 하면 승복율이 높아질 것이고, 경륜 있는 전관들이 이 일을 맡는 것이 관례화 된다면 전관예우 문제도 어느 정도 돌파구가 생기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누가 센터장 및 상임위원으로 나설 것인가 였다. 센터장을 맡을 정도의 경륜이면 대형로펌 대표급이나 고문급인데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올 사람은 드문 게 현실이었다.
 
◇"'전관예우 없애자' 박병대 실장 권유에 즉석에서 승낙"
 
2009년 초순 박병대 법원행정처 기획실장(현 대법관)은 고민 끝에 박 센터장을 찾아갔다. 그는 당시 법무법인 광장의 고문을 맡고 있었으나 박 실장의 취지를 듣고 박 센터장은 즉석에서 승낙했다.
 
그를 따라 이용호 게이트사건 특별검사를 맡았던 차정일(71·사시 8회) 변호사, 박영무 전 사법연수원장(70·사시 8회), 서울고법판사 출신으로 청와대 민정수석실 법무비서관을 역임한 황덕남 변호사(56·연수원 13기) 등이 조정센터에 합류했다.
 
전관예우와 관련된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퇴임을 6개월여 앞두고 박 센터장은 대법원을 찾아갔다. 임기가 아직 남았지만 후임 문제를 거론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김능환·박일환·안대희·전수안 등 네명의 대법관이 퇴임을 앞두고 있었는데, 퇴임 후 자신을 이어 대법관 출신이 조정센터장을 맡기를 원했던 것이다. 물론 전관예우 문제 해결이라는 전통을 세우고 싶었던 뜻도 있었다.
 
그러나 박 센터장의 뜻은 이뤄지지 않았다. 네명의 대법관이 모두 고사했기 때문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대법관들 모두 6년간 수많은 사건에 시달리다 보니 우선 휴식이 필요했다고 한다.
 
◇대법원 '센터장 비상근 조정' 검토 중
 
박 센터장은 "아쉽지만, 대법관으로 일하다가 곧바로 매일 출근해 당사자를 만나야 하는 조정센터장이 부담러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됐다. 후배 대법관들의 고충이 이해가 됐다"고 말했다. 대법원은 이 일을 계기로 조정센터장을 상근에서 비상근으로 조정하는 안을 검토 중이다.
 
실제로 당시 퇴임한 대법관들 네명 모두 개업을 하지 않았다. 안 대법관은 새누리당 정치쇄신특별위원장을 맡아 활동했으나 곧 건국대 로스쿨 교수가 됐고, 김 대법관은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의 잔여임기를 마치고 편의점을 운영하고 있다. 박 대법관과 전 대법관 역시 아무데도 적을 두지 않고 있다.
 
박 센터장은 전관예우 문제와 관련해 "오랜 경륜을 갖춘 원로가 기업이나 로펌의 울타리 역할로 전락해서는 안된다"면서도 "원로 법조인들이 나가서 일할 수 있는 직역을 정부차원에서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법원장이나 검사장 출신 법조인이 로펌으로 몰려가는 것에 대해서도 "퇴직한 고위 법조인들이 모두 로스쿨이나 대학으로 가기는 힘든 일"이라며 "조정센터 등 그들의 경험을 펼칠 수 있는 공익적 차원의 법률서비스 기관을 활성화 하는 것이 하나의 대안"이라고 강조했다.
 
박 센터장은 퇴임후 거취 질문에 "법조인으로서의 생활을 완전히 마감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62년부터 했으니 50년 넘게 한 셈인데 후배 변호사들도 많은데 길을 내주는 것이 도리 아니겠느냐"며 "여행도 다니고 봉사할 곳 있으면 봉사도 하고 그렇게 지낼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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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