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3일 저녁 서울 광화문사거리에서 열린 대통령 퇴진 촉구 촛불집회에 참가한 한 어린이가 촛불을 들고 있다. 사진/뉴시스
[뉴스토마토 최기철·이성휘 기자]2016년 10월29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 촛불 3만개가 피어올랐다. 9월 중순 ‘비선실세’ 최순실의 실체가 야당과 언론을 통해 드러난 지 한 달 여 만에 실현된 직접적인 주권행사였다. 동시에 장장 7개월에 걸친 거대한 여정의 서막이었다. 이후에 헌정사상 초유의 현직 대통령 탄핵과 구속기소를 불러왔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박근혜 당시 대통령은 더욱 그랬다. 그는 이에 앞서 최씨 존재에 대한 의혹이 겉잡을 수 없이 번지자 같은 달 24일 개헌 카드를 던졌다. 여론 무마용이었다. 박 전 대통령과 측근들은 개헌 이슈가 자신과 최씨의 비리 고리를 덮어줄 것으로 판단했다. 당시 여당이었던 새누리당도 대통령의 의중을 받들었다.
그러나 같은 날 ‘최순실 태블릿 PC’의 실체가 보도되면서 ‘최순실 게이트’는 박 전 대통령이 직접 개입된 ‘국정농단 사건’으로 확산됐다. 25일 박 전 대통령은 서둘러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최순실에게 도움 받은 적이 있다”고 시인했다. 그러나 일방적 해명이었고 진지한 사과는 없었다. 의혹은 더욱 부풀었으며, 민심은 크게 요동쳤다.
결국 그 민심이 광장으로 뛰쳐나왔다. 애초 수천명으로 예상됐지만 3만명(이하 주최측 추산)에 달하는 시민이 모여 “박근혜 퇴진”을 외쳤다. 국내는 물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계 어느 역사에서도 찾기 힘든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비폭력 시민저항의 태동이었다. 시민 참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11월5일 2차 촛불집회에는 20만명으로 급증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2차 대국민 담화와 지난해 11월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쓰러졌다가 입원치료 중 숨 진 고 백남기 농민의 사망이 기폭제가 됐다. 11월12일 3차집회에는 서울에만 100만명이 모였다. 4·19혁명, 87년 6월 항쟁에 이은 세 번째 민주주의 혁명이지만 그 규모는 헌정사상 최대 규모였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과 측근, 청와대는 현실을 부정했다. 같은 달 29일 가진 제3차 담화에서 국정농단 사태가 국가를 위한 일이었고, 최씨의 비리는 자신과 관계 없다고 선을 그었다. 자신의 진퇴 문제도 국회가 결정하라고 떠밀었다. 국회는 박 대통령이 넘긴 공을 받은 뒤 탄핵발의에 진통을 겪었다.
성난 촛불은 드디어 스스로 정당성을 부여한 국회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3차 담화 직후 12월3일 열린 6차 촛불집회 참여인원은 전국 총 232만명(서울 170만명, 지방 62만명)으로 절정을 이루면서 정국을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로 이끌었다. 12월9일 투표자 299명 중 찬성 234명, 반대 56명, 기권 2명, 무효 7명으로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여의도와 광화문 광장은 기쁨과 열광의 도가니였다. 그 주 주말 촛불집회에는 전국 총 104만명(서울 80만명, 지방 24만명)이 모여 헌법재판소의 조속한 탄핵인용을 촉구했다.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가 지난 3월10일 이정미 재판소장 권한대행 주재로 대통령 박근혜에 대한 파면 선고를 내리고 있다. 사진/뉴시스
연말까지 이어진 촛불집회는 병신년의 마지막 날 광화문 광장에서 ‘송박영신(박근혜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한다)’으로 또 한번의 기록을 세웠다. 10차 집회이기도 했던 그날은 총 90만명이 모여 총 누적인원 1000만명을 돌파했다. 해를 넘겨 정유년을 맞은 시민들은 구악으로 뭉쳐진 적폐 청산과 국정농단에 부역한 재벌기업 총수들에 대한 엄단을 강하게 요구했다.
촛불혁명은 적폐의 정점인 박근혜 전 대통령을 결국 끌어내렸다. 헌법재판소가 박 전 대통령을 파면한 다음 날인 지난 3월11일 열린 ‘20차 촛불집회’는 그 어느 때보다 생기 있고 활기찬 축제 그 자체였다. 이날만 전국적으로 70만명의 시민들이 모이면서 누적인원 1600만명이라는 역사적 기록을 세웠다. 지난 3월25일 세월호 3주기를 앞두고 다시 시작된 촛불집회는 지난 4월29일 23차 집회까지 이어졌다. 총 참여누적인원 1700만명, 대한민국 국민 3명 중 한명은 촛불을 들었던 182일간의 역사적 흐름은 이날을 기점으로 잠시 휴식기에 들어갔다.
살을 에는 겨울 광장에 봄을 불러온 ‘촛불혁명’은 대한민국 국민의 품격 그 자체였다. 자주적이면서 질서정연했고, 엄중한 분노가 휘몰아치는 가운데에서도 해학이 넘쳤다. 커질 대로 커지고 깊어질 대로 깊어진 ‘촛불’이라는 시루에는 박근혜 퇴진, 적폐청산, 재벌개혁 뿐만 아니라 정치-선거제도 개혁, 일자리 개혁, 노동기본권 개혁 등 이시대의 과제가 모두 담겨 상처받은 국민 서로가 목을 기대고 어루만지는 광장이 됐다.
이런 촛불혁명을 관통하는 핵심은 역시 민주주의였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정한 헌법 1조 2항의 실현이었다. 5월9일, 제19대 대통령선거는 시민이 독재와 적폐로부터 다시 찾은 주권을 직접 행사하는 기회다. 짧은 기간 동안 선거 분위기가 과열되면서 구태가 재연되기도 했지만, 국민들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밝다. 26.06% 라는 역대 최고의 사전투표 비율은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다. 때문에 전문가들 중에는 투표율 80% 돌파를 전망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날 대선투표는 오전 6시에 시작돼 오후 8시 종료된다. 궐위선거이기 때문에 투표 마감시간이 2시간 연장됐다. 개표는 투표 종료 후 시작돼 다음 날 오전 6~7시쯤에 최종 완료될 것으로 예상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역시 이번 대선 투표율이 20년 만에 80%대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다. 선관위 측은 “유권자 의식조사 결과 적극 투표층이 많아졌고, 투표 마감 시간도 연장됐다”며 “사전투표율이 26.1%에 달한 점 등을 고려할 때 이번 대선 최종투표율이 80%를 넘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대통령 선거 최종 투표율이 80%를 넘은 것은 지난 1997년 15대 대선(80.7%)이 마지막이다.
또 선관위는 개표율이 70~80%에 이를 10일 오전 2~3시쯤 당선자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예측했다. 다만 실제로는 9일 밤 11시 전후에 윤곽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각 방송사들이 투표소 출구조사와 그간 비공개로 진행된 지역별 여론조사 자료들을 가지고 선관위 개표 진행 상황에 맞춰 당선인 예측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지난 8일 오후 경기 수원 팔달구선거관리위원회에서 한 관계자가 태극기를 배경으로 투표를 독려하는 몸짓을 보이고 있다. 사진/뉴시스
최기철·이성휘 기자 lawch@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