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환 어린 해방촌, '뜨내기 마을'에서 '미래형 공동체'로 바뀐다

'도시재생' 지역으로 선정…70여년 만에 '새바람'

입력 : 2017-06-19 오전 6:00:00
[뉴스토마토 박용준기자] 해방촌. 1945년 광복과 함께 해외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하나 둘 서울 남산 자락에 모여산 것이 시작이었다. 한국전쟁 전에는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정착했고 한국전쟁 중에는 피난민들이 기대 사는 보금자리였다. ‘뜨내기’ 마을이라고 해서 설움도 받았지만 교복 자율화 시절에는 니트공장이 대규모로 들어서면서 호황도 누렸다. 그러나 인터넷 시대, 스마트폰 시대로 접어들면서 여러 사정을 겪으면서 차차 서울 속의 변두리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해방촌이 다시 태어난다. 도시재생 사업지역으로 지정되면서 서울시와 국토부가 2020년까지 100억원을 투자해 개발한다. 해방촌이 다시 사람을 품어주는 따뜻한 공동체 공간으로 조성된다.
 
타향살이 44년…삼남매 키워준 고마운 신흥시장”
 
1970년대 제대한 후 삶의 터전을 찾아 서울 용산구 해방촌 신흥시장에 자리잡은 충남정육점 사장 방춘만(69) 씨는 해방촌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기고 오랜기간 동네 대소사에 함께할 정도의 터줏대감이다. 1980년대 교복 자율화 바람이 불면서 해방촌 신흥시장 니트공장을 운영하던 그의 친구들은 몰려드는 일감에 너스레를 떨 정도였고 방 씨에게 꽤나 자주 비싼 술도 샀다.
 
충남정육점 역시 대형 냉장고를 2~3일이면 금방 비워낼 정도로 장사가 잘 됐고, 덕분에 방 씨는 슬하 3남매를 모두 해방촌 신흥시장에서 시집·장가까지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며 분위기는 급속도로 바뀌었고, 신흥시장에 모여들던 사람들은 다른 전통시장이나 대형마트로 발길을 돌렸다.
 
해방촌 주민들을 들뜨게 했던 2000년대 초중반 남산~한강 녹지축 개발 소식도 결국 부동산 가격만 뛰게 했을 뿐 강남의 큰 손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가운데 주민들의 자리는 줄었다. 함께 수십년을 지내던 방 씨의 친구들은 니트공장과 상점을 외지인에게 넘기고 해방촌을 떠났다. 이제 방 씨의 하루 매출은 3만~4만원에 그칠 정도로 줄었지만, 그래도 방 씨는 항상 정육점, 그리고 신흥시장을 지키고 있다.
 
그나마 최근 2~3년 사이 유명한 연예인도 책방을 열었다고 하고, 커피집도, 공방도 하나둘 문을 열면서 젊은 사람들이 꽤나 늘었다. 그렇다고 방 씨 입장에선 웃을 일만은 아닌 것이 젊은 사람들이 늘어난다고 충남정육점에서 고기 한 점 사가는 일은 흔하지 않다.
 
오히려 주차 문제, 흡연 문제로 방 씨와 갈등을 빚을 때도 많고, 이젠 반찬가게, 야채가게 대신 커피집·공방 등이 들어서며 예전 풍경이 사라지는 것이 썩 반가운 일만은 아니다. 그래도 방 씨는 서울시에서, 또 국가에서 나서서 하는 이번 사업이 너무 오래 끌지 말고, 외지인들 좋은 일만 시키지 말고 신흥시장이랑 해방촌에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 뿐이다.
 
방 씨는 “아직 더 일할 수 있지만, 오랜 기간 함께 시장을 지키던 가게들이 하나둘 없어지는 걸 보면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란 생각’도 든다”며 “당장 내 수입엔 별 도움이 안 될지 몰라도 기왕 높은 사람들이 나선다니 신흥시장과 해방촌이 멋지게 바뀌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어울림·따뜻함'에 반해 아예 눌러 살아”
 
 
충남정육점과 불과 20m도 안 떨어진 곳에 올 4월부터 ‘비플로르 키친’이라는 원테이블 키친을 친구와 함께 운영하는 강지영(26·여) 씨는 지난해 해방촌에 우연히 놀러왔다가 신흥시장과 해방촌의 매력에 푹 빠져 아예 눌러앉았다.
 
강 씨는 창원 출신으로 창업의 꿈을 안고 서울 명동에서 ‘비플로르’라는 멀티 플라워 샵을 운영하다, 지금은 집도 해방촌으로 옮기고 신흥시장에 세컨드 샵을 차렸다. 워낙 건물이 낡아 전문 인력 도움 없이 젊은 여자 둘이서 내부 공사를 하기엔 시간도 비용도 배는 힘들었지만, 몇 달간의 공사 끝에 특색있는 가게 많다는 해방촌 신흥시장 내에서도 독특한 공간을 탄생시켰다.
 
강 씨의 손재주가 뛰어난 탓에 김치찌개, 불고기, 파스타는 물론 신흥시장 근처에서 찾기 어려운 메뉴도 사전에 귀띔만 해주면 비를로르 키친의 6인용 식탁에 근사하게 올라간다. 개업 두 달여 만에 SNS에서 입 소문을 타고 20~30대들이 제법 많이 찾고 있으며, 앞으로는 쿠킹클래스나 디저트클래스도 계획 중이다.
 
강 씨가 해방촌에 자리잡은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어울림’과 ‘따뜻함’이다. 외국인도 제법 오가고 외지인도 많이 찾는 해방촌 신흥시장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이전부터 신흥시장에서 가게를 운영하던 상인들도 초기에는 약간의 경계를 했지만, 강 씨가 먼저 인사를 건네자 차츰 마음을 열고 강 씨와 기꺼이 소통하고 있다.
 
강 씨보다 앞서 많은 예술가나 청년상인들도 자리잡고 있어 함께 어울릴만한 요소도 많고, 곳곳에 포스터로 붙어있는 주민 공동체 행사도 쉽게 참여할 수 있어 강 씨에겐 흥미로운 일들로 가득하다. 강 씨도 가게의 성공도 성공이지만, 신흥시장, 나아가 행방촌 사람들에게 요리나 꽃도 가르쳐주고 어울리고 싶다는 소망을 전했다.
 
강 씨는 “원테이블 키친 구성상 독립적인 분위기가 필요해 일부러 신흥시장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며 “앞으로 신흥시장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없어질까 걱정도 되지만, 그러면 그런대로 재미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도시재생 지난달 확정, 2020년까지 100억원 지원
 
신흥시장은 일명 ‘해방촌시장’이라고도 불리며 한때 2만2000명, 지금은 1만2000명이 사는 ‘하늘 아래 첫 동네’ 해방촌(용산구 용산2가동 면적 33만2000㎡)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지난달 11일 도시재생 활성화계획이 확정됐지만, 이미 사업 구상이 알려진 3~4년 전부터 신흥시장은 자발적인 변화가 시작된 모습이다.
 
서울시는 물론 국토부도 참여해 2020년까지 총 100억원을 투입, 해방촌을 다시 사람이 통하고 공동체로 어우러지는 곳으로 만들 계획이다. 우선 신흥시장은 슬레이트 지붕을 걷어내는 등 환경을 개선하고 개성을 한층 살려 아트마켓으로 조성할 예정이다.
 
한때 공장만 100여곳에 달했다는 니트산업도 다시 활력을 불어넣고자 공동브랜드, 공동판매장, 온라인마켓 등을 추진한다. 해방촌 테마가로를만들어 남산에서 이태원으로 이어지는 길에 역사와 문화를 입히고, 관광객 유입으로 지역 활성화도 이끈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것은 주민이다. 초창기 정착한 주민부터 최근 이사 온 청년들에 외국인까지 함께 평화롭게 어우러지도록 마을공동체 규약도 만들고, 다문화 교육, 주민 음악회, 문화예술 교류 등 다양한 공동체 지원사업으로 주민공동체의 힘을 키운다. 해방촌 재생지원센터 관계자는 “계획이 확정된 만큼 올 하반기부터 해방촌 변화에 속도가 조금씩 붙을 것”이라며 “해방촌 고유의 색을 잃지 않으면서 활력을 더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서울 용산구 해방촌 신흥시장의 청년상인 모습. 사진/박용준기자

 
박용준 기자 yjunsay@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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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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