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은 이학수가 허위 자백을 한 것이고 진술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이학수를 비롯한 삼성전자 임직원들 전체가 허위자백을 할 만한 사정을 발견하기 어렵고 이학수 진술은 증거가 추가로 발견됨에 따라 추가로 범행을 인정한 취지라고 보여집니다.”
지난 5일 법원은 “‘다스의 주인’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라고 판단했다. 15년간의 지루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재판장은 판결이유에 이어 “피고인을 징역 15년 및 벌금 130억 원에 처한다”고 주문을 낭독하면서 움직이지 않는 이 사실을 헌법이 부여한 사법부의 권한으로 공식화 했다.
선고 공판이 진행되는 1시간 4분30초 동안 전 국민은 TV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일부는 후련하다는, 일부는 안타깝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다시 찾은 사법정의를 확인했다는 뿌듯함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앞의 판결이유는 ‘다스 소유주 논란’과 관련해 비교적 최근에 드러난 ‘삼성뇌물’에 대한 내용으로, 이 전 대통령의 책임을 더욱 무겁게 한 핵심 혐의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독자께서는 어떻게 보시는가.
재판장이 엄숙하게 낭독한 판결이유 말미의 “~보여집니다”는 우리말 문법적으로 틀린 표현이다. A4지 약 20매 분량의 판결이유와 주문이 낭독되는 동안 “~보여집니다”라는 표현은 총 5회 나온다. 국립국어원 설명에 따르면, '보여지다'는 피동사 '보이다' 뒤에 피동의 뜻을 나타내는 '-어지다'가 또 붙은 것이다. 피동의 뜻이 겹치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말에서는 이를 용인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보다'의 피동사 '보이다'를 써서 '보인다'와 같이 표현하는 것이 알맞다. 개인적으로는 ‘보인다’라는 피동사보다 '본다', ‘판단한다’ 따위의 적극적인 능동사를 사용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말 하고 싶은 것은 이 전 대통령에 대한 판결문을 통해 우리 사법부의 잘못된 한글사용을 지적하자는 것이 아니다. 올해 1월1일부터 10월1일까지 네이버 뉴스포털에서 검색된 ‘보여집니다’라는 잘못된 표현은 총 2317건이다. 대부분 방송을 통해 보도되고 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방송3사는 물론, 비교적 신뢰도가 높다는 종편 메인 뉴스에서도 앵커들이나 기자들이 아무렇지 않게 쓰고 있다는 것이다. 너무나 익숙하고 자연스러워 이제는 ‘봅니다’나 ‘보입니다’라는 표현이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다.
생각건대, 이 간지러운 ‘~보여집니다’라는 정체불명의 말은 자신의 말을 책임지지 않겠다는 취지에서 발로된 것이며, 그 비겁함을 ‘겸손’과 ‘완곡함’이라는 가면 뒤에 숨기는 잔재주라고 본다. 2000년대 초반 습관적으로 아무데나 붙이는 ‘~한 것 같다’라는 말도 그랬다. 혹한의 겨울, 전방에서 군장병들의 일상을 전하는 기자가 “오늘 이곳 기온은 영하 24도까지 내려갔습니다. 저도 매우 추운 것 같습니다”라거나 소금이 잔뜩 들어간 설렁탕을 먹고는 “너무나 맛이 짠 것 같아요”라고 하는 것은 당시 방송에서 별도 프로그램을 통해 지적할 만큼 심각했다. 상당한 세월이 지났으나 이 문제적 표현은 반복되고 있다.
최근에는 그 어렵다는 언론고시를 통과한 아나운서들이 ‘가늘다’와 ‘얇다’를 시도 때도 없이 혼동하고 있어 퍽 안타깝다. "전 운동을 많이 못해 다리가 얇아요" 따위가 그 예다. 휴대전화기가 없던 시절, 새벽에 버스를 타고 퇴근하던 중 라디오 음악방송을 진행하는 아나운서 후배가 ‘초콜릿’을 ‘초콜렛’으로 발음한 것을 듣고 도중에 내려 전화로 크게 혼냈다는 원로 아나운서 선배가 그립다.
내일이 572돌을 맞는 한글날이다. ‘급식체가 어떻고, 야민정음이 어떻다’고 아이들 나무라기 전에 우리가 잘못 쓰고 있는 말부터 바로 잡아야 할 일이다.
최기철 사회부장(lawch@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