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어주는기자)여행은 일상의 탈출, 삶의 주도권을 갖는 것

여행의 핵심은 '자기 결정력'…'삶의 주인'으로 느끼는 행복과 자유
여행의 이유|김영하 지음|문학동네 펴냄

입력 : 2019-07-12 오전 6:00:00
[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페이지를 넘길수록 기억이 선명해진다. 처음으로 간 여행지, 국가, 도시. 그곳에서 만난 자연과 사람, 하다못해 공기의 향까지도. 일면식도 없는 타자의 언어가 자아의 오랜 경험들을 되감는다. 낡은 영사기를 힘껏 돌려대는 흑백필름처럼…. 여행은 무엇이고 왜 하는지, 그의 근원적 문답은 곧 독자에게 돌아온다. 여태껏 그리 진지하고, 논리 정연하게 정리해 본 적이 없었다.
 
소위 제목으로 '낚는' 서적들이 즐비한 세상에서, 이 책은 제목에 아주 충실하다. 단순히 어떤 여행지가 좋은지, 감명 깊은지를 말하려는 내용이 아니다. 그동안 우리가 캐지 못했던, 어쩌면 캐려고도 하지 않았던 '여행의 이유'에 대한 나름의 기록이며 철학이다. 페이지를 여는 순간, 소설가 김영하가 설계한 '타임머신'을 함께 타게 된다. 이윽고 그의 과거 시공을 뒤죽박죽 건너게 된다.
 
키미테를 붙이고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는 20대의 김영하가, 때론 집을 처분하고 뉴욕으로 향하는 40대의 김영하가 있다. 여섯번의 전학을 가야만 했던, 긴 방랑기의 초등학생 김영하도 때때로 고개를 내민다. 삶과 소설, 현실의 비유와 대조로 빚은 여행의 이유들이 거기에 있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이주나 피난과 다르다는 데 있다. 핵심은 '자기 결정력'이다. 전 과정을 스스로 계획하고 통제할 수 있다. 비행기와 호텔, 렌터카를 예약하고 예산과 일정에 맞춰 가야할 곳을 내가 선택한다. 이주와 피난이 어지럽고 복잡한 현실에서 벌어지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 여행은 스스로가 선택해 정제된 환상을 경험하는 것이다. 현실 속 어지러운 잡음을 제거한 뒤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소설과 비슷하다.
 
초등학교 때부터 전학을 가야만 했던 유랑민. 자기 결정이 아닌, 부모님에 의한 결정이던 나날들. 이 과거의 날들에 비하면 저자에게 대학 시절 홀로 떠난 유럽 배낭여행은 온전한 자신의 힘으로 일궈낸 순간이었다. 비록 바게트 빵 하나로 세끼를 떼웠어도, 숙박비를 아끼려 여행 절반을 기차역에서 잤어도 그 순간들에서 그는 '삶의 주인'인 듯한 경험을 했다고 회고한다.
 
"그제서야 비로소 진짜 여행이 가져다 주는 행복감과 자유로움을 알게 됐다. 어린 날의 (강제)이주와는 너무나 다른 경험. 그것은 바로 그(내) 자신의 여행이었다."
 
자신의 통제권을 갖는 여행은 빽빽한 일상에서 우리를 구출한다. 해야 할 일들과 미뤄뒀던 일들에서 우리를 탈출시킨다. 여행지에선 괴로운 일들을 묵묵히 견딜 필요가 없다. 미련 없이 다른 곳을 향해 떠나면 그만이 된다. 현지인들이 겪는 자잘하고 어지러운 일상이 우릴 괴롭히진 못한다. 현지인들이 심드렁하게 지나치는 건물과 거리에 카메라를 들이대며 사진을 찍는다. 여행은 일상의 부재다.
 
"지금도 나는 비행기가 힘차게 활주로를 박차고 인천공항을 이륙하는 순간마다 삶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하는 기분이 든다. 휴대전화 전원이 꺼지면서 누군가가 불쑥 전화를 걸어올 일이 없어진다. (중략) 여행에 대한 강렬한 기대와 흥분이 마음속에서 일렁이기 시작하는 것도 그때쯤이다. 내 삶이 온전히 나만의 것이라는 내면의 목소리를 다시 듣게 되는 것도 바로 그 순간이다."
 
책은 삶과 글쓰기로 길어 올린 수많은 여행지들을 경유한다. 무비자로 강제 추방 당한 15년 전 상하이 푸둥 공항과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가 열리던 2011년 뉴욕, 평생 작가로 살수 있을까 고민하던 시기 떠난 멕시코와 과테말라…. 이 시공을 오가는 여정에는 쥘 베른의 '15소년 표류기',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 노아 크루먼의 프로그램 개념(인물의 무의식 속 잠재된 일종의 신념) 등이 오르 내린다. 작가이자 20년차 베테랑 여행가로서, 빚어낸 여행에 관한 인문학적 사유의 성찬이다.
 
문득 책을 덮고 나니 '나의 여행'은 무엇인가를 돌아보게 된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꾸준히 다녔던 것인가, 인간은 왜 여행을 하는가, 하는 저자와 같은 질문들. 문득 2년 전 6월의 아이슬란드가 떠오른다. 그때 그 '세계의 끝'에서 느낀 모든 건 현실 속 비현실이었다. 케플라비크 공항에 내려 맡은 상쾌한 가을향, 새벽 3시경에도 해가 지지 않던 백야, 동화 같은 레이캬비크마을과 굴포스 폭포 위로 뜬 무지개…. 사진을 꺼내본다. 일상은 거기 없다. 해맑게 웃는 내가 있다. 삶의 주도권이 온전한 내가 있다. 
 
김영하 '여행의 이유'. 사진/문학동네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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