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데뷔 50주년을 맞은 가수 이장희(72)는 여전히 그 날을 기억한다. 길거리 한 가운데 늘어선 전파상 앞, 지구 맨틀 아래 움직이는 마그마처럼 가슴이 뜨겁게 데워지던 순간을.
초등학생 이장희의 1950년대 어느 날이다. 전파상 입구에 달린 조그만 확성기에 그는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태평양, 대서양을 횡단한 팝송이 가슴에 자꾸만 스파크를 튀겨댔다.
30일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복합문화공간 에무에서 만난 그는 “지난 50년간 음악은 어떤 의미였냐”고 물은 본지 기자 질문에 60여년 전의 그날의 기억을 꺼내며 이렇게 말했다. 마이크도 필요 없는 특유의 쩌렁쩌렁한 발성으로.
“일흔 평생 제 가슴을 가장 울린 건 오직 음악이었습니다. 그 어린 시절 확성기로 듣던 그 순간의 울림은 이후 모든 것을 바꿨습니다. 지금도 세상만사 잊어버리고 음악에 푹 빠지는 순간, 그 때가 생이 가장 아름다워 보여요. 허허허”
가수 이장희. 사진/PRM
그를 두고 대중들이 가장 많이 떠올리는 단어는 ‘쎄시봉’이다. 1960년대 서울 무교동 음악다방이었던 이 곳을 아지트 삼아 그는 송창식, 조영남, 윤형주 등과 어울려 통기타 1세대로 활약했다. 이후 1971년 DJ 이종환의 권유로 가요계에 정식 데뷔했다.
번안곡이 주를 이루던 당시 그는 자작곡에 도전하며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했다. 포크와 록을 넘나드는 멜로디와 감성적인 노랫말은 엄혹한 시대를 살던 당대 젊은이들을 위로하고 흔들었다. 콧수염, 오토바이, 통기타는 그의 표상이었고, ‘그건 너’, ‘한잔의 추억’,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내 나이 육십하고 하나일 때’ 등 대표곡들은 많은 사랑을 받았다. 청춘, 자유, 꿈…. 그의 노래는 주로 삶에서 길어 올린 언어들이다.
“저는 아직도 악보 볼 줄 모릅니다. 며칠에 걸쳐 가사 쓰는 데만 일단 집중해요. 정서는 자연히 흘러 음률과 멜로디가 됩니다.”
가수 이장희. 사진/PRM
국내에 대마초 파동이 불던 1975년 그는 잠정 가요계를 떠났다. 미국에서 라디오 방송과 음반제작 등 사업을 했고, 1997년 울릉도 살이를 시작했다. 10년 뒤 ‘동방의 빛’으로 활동하던 음악 동료 강근식(73·기타리스트), 조원익(72·더블 베이시스트)이 그를 따라왔다. 2018년부터 이장희 집 앞 뜰에 문화시설 ‘울릉 천국 아트센터’가 지어져 이 곳에서 함께 음악을 만들고 공연도 한다. 최근 옛 가수들을 조명하는 대중음악계 흐름으로 미뤄보면 그는 원조격이다.
“가요계를 떠나기 전까지 음악 활동은 이상하게 불편했습니다. 다른 사람들 시선이 늘 신경 쓰였죠. 35년 만에 가요계에 돌아온 순간, 깨달았습니다. 음악을 열렬히 좋아하는 그게 저라는 걸요.”
올해 데뷔 50주년을 맞은 그는 오는 3월29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단독 공연 ‘나의 노래, 나의 인생’을 연다. 지난해부터 계속 이어온 공연들과 크게 다르거나 특별한 점은 없다. 그는 “49년이든, 50년이든, 51년이든 내게 큰 의미는 없다”며 “다만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굴곡의 생을 정리해보는 자리는 필요했다. 가까이 지내던 동료, 후배 뮤지션들이 함께 한다”고 담백하게 소개했다.
가수 이장희. 사진/PRM
50년이 흐른 지금에도 생생한 목소리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을 그는 “일어나자마자 1시간씩 걸으며 건강 관리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음악보다 소중한 것으로는 자연을 꼽고 “면벽수련을 하는 스님들과 설악산 암자에서 3개월을 살며 느꼈다. 이후 미국 데스밸리, 요세미티를 200번 넘게 찾았다”고 했다.
“지금은 50년 된 친구들과 울릉도에서 와인 한잔 하며 음악을 하고 있습니다. 바다 위 구름이 적당히 진, 한 줌의 해를 바라보면서요. 쓸쓸하기도, 헛헛하기도 하지만 안온하기도 한 이 황혼의 정서가 다음 음악이 될 겁니다.”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