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밴드신의 ‘찬란한 광휘’를 위해 한결같이 앨범을 만들고, 공연을 하고,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TV, 차트를 가득 메우는 음악 포화에 그들은 묻혀지고, 사라진다. ‘죽어버린 밴드의 시대’라는 한 록 밴드 보컬의 넋두리처럼, 오늘날 한국 음악계는 실험성과 다양성이 소멸해 버린 지 오래다. ‘권익도의 밴드유랑’ 코너에서는 이런 슬픈 상황에서도‘밝게 빛나는’ 뮤지션들을 유랑자의 마음으로 산책하듯 살펴본다. (편집자 주)
넓은 거실 한복판, 소파에 축 늘어져 이들은 음악 아이디어를 교류하곤 한다. “브리티시 록에 모타운을 섞어보자.” “마이클잭슨처럼 해볼래?” 보통 일주 3~4번 정도 이 거실 옆 합주실에 모인다. 9~12시간 밀도 높은 연주 뒤 전소(全燒). 그 끝은 다시 여기다. 늘어져 음악 얘기다.
“연습량만 많다고 만족스러운 음악이 나오진 않죠.”
대화는 이들에게 ‘바다’다. 펄떡이는 새로운 것들을 건져 올릴 수 있다. 클리셰를 비켜가는 이유다.
최근 밴드신에서 ‘핫’한 루키로 부상 중인 SURL[설호승(보컬·기타), 이한빈(베이스), 김도연(기타), 오명석(드럼)]을 지난달 25일 그들의 ‘아지트’에서 만났다. 서울 광흥창역 인근 해피로봇레코드 사무실 안에 마련된 SURL의 창작, 연주 공간. 지난해까지 서울 합정역 인근에 있던 사무실은 최근 이 곳으로 이전했다.
밴드 SURL. 왼쪽부터 설호승(보컬·기타), 이한빈(베이스), 김도연(기타), 오명석(드럼).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합주실과 거실 간 물리적 거리감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합주실 ‘전소’ 뒤 거실 노란 조명을 켜고 ‘창작’ 한다. 이들은 “돌이켜 보니 밴드의 상징 같은 곡들이 모두 두 공간을 배회하다 나왔다“고 했다.
2018년 첫 EP ‘Aren’t You?’로 이들은 단박에 밴드신의 ‘총아(寵兒)’로 부상했다. 이펙터와 신스 효과를 활용한 몽글몽글한 소리의 질감은 이들 음악의 특징이다. 브리티시 록, 블루스에 걸쳐진 이들 만의 묘한 장르는 매의 눈을 치켜 뜬 국내외 음악 관계자 레이더 망에 걸렸다. ‘신한카드 루키 프로젝트’ 대상, ‘EBS 올해의 헬로루키 with KOCCA’ 우수상, 영국 록 밴드 낫띵 벗 띠브스 오프닝 밴드, 해외 페스티벌 초청…. 업계에서는 혁오, 잔나비, 새소년, 세이수미로 이어지는 최근의 밴드신 부흥을 이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스멀스멀 나온다.
밴드명 SURL은 한자 말씀 설(說)의 영문 표기. ‘이야기를 들려주는 밴드’라는 뜻이다. 멤버들 모두 ”평소 내향적인 성격 탓에 이런 이름을 짓게 됐다”며 홍조 띈 얼굴로 애써 시선을 피한다.
“누구나 ‘힘듦’을 안고 가는 세상이라 생각해요. 속에 담았다가 터져 버리는 경우도 많고. 그걸 가사로 써 보면? 우리에게도 듣는 이들에게도 위로 내지 해소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아요.”(호승)
밴드 SURL 설호승(보컬·기타).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대표곡 ‘눈’은 주변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 지평을 확장한 산물이다. 크리스마스 날 쓸쓸한 화자에 상대적 박탈, 소외를 겪는 우리들 잔상이 겹쳐지고 만다.
밴드 네 명이 악기를 이고 만원 지하철에서 끙끙 대던 기억(‘9 지하철’)과 누군가로부터 거절을 받아들였을 때 찾아오는 공허함(‘Dry Flower’), 어딘가로 나아가야 할지 모를 만큼 막막한 순간들(‘길’). 다른 대표곡에도 이 시대 청춘들의 현실 자화상이 아른거린다.
“저희들을 비롯해 지금 우리의 또래들을 보면 무언가 몸부림 치고 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꼰대’ 라는 신조어가 생겨날 정도로 세대 간 적대감도 큰 것 같고요.”(한빈) “우리 세대의 앞날이 예측되지 않는 문제도 심각하다고 생각해요. 곳곳에 무너질 요인들이 넘쳐나는 것 같아요.”(도연)
밴드 SURL. 왼쪽부터 설호승(보컬·기타), 이한빈(베이스), 김도연(기타), 오명석(드럼).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이들 멤버 전원은 1998년생, ‘IMF둥이’들이다. 고등학교를 함께 졸업하고 스무살이 되던 해, 밴드를 결성했다. 한빈과 호승이 먼저 팀을 꾸리고 뒤늦게 명석과 도연이 합류했다.
수평적인 관계는 이들을 훨씬 자발적이고 창의적인 아티스트로 만든다. 멤버 한 명이 코드를 가져오면 나머지 멤버들이 이어 붙이며 새로운 것들로 전개시킨다. 가사도 멤버 한 명이 컴퓨터 앞에 앉으면 나머지가 둥그런 대열로 서서 아이디어를 던지는 식으로 쓴다.
음악적 동료이지만 둘도 없는 동갑내기 친구들이기도 하다. 작업을 끝내면 PC방으로 우당탕 몰려가 ‘리프레시’ 한다.
“학교 다닐 때나 지금이나 모두 음악을 즐기고 좋아하는 건 같아요. 그게 일이 돼 신기할 뿐이죠. 이게 저희의 ‘사회 생활’이지만, 사실 별 다를 건 없어요.”(호승) “보통 음악신에는 형, 동생으로 얽혀 있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저희는 동갑 친구들이이죠. 대신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음악, 우린 그런 걸 할 수 있어요.”(한빈)
밴드 SURL 이한빈(베이스).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