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익도의 밴드유랑)잠비나이, '팬데믹 속 작은 촛불들'

새 EP 음반 '발현'…타오르는 연주의 화학작용
"은은한 촛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연주의 내적성장 이뤄"…내년 글로벌 투어 빼곡

입력 : 2022-12-14 오전 12:00:00
[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술대(국악에서 오른손에 끼워 줄을 퉁기는 연필 크기의 막대)로 거문고를 타격해 생성시킨 장단의 잔향부터 시간의 흐름을 분절하듯 입체적이다.
 
이 흙처럼 거친 소리 위로 해금이 찢어질듯 울어대고, 드럼과 베이스가 쪼개진 리듬들을 '무수한 점들'처럼 찍어댄다. 
 
전자기타의 일그러진 노이즈들이 더해지며, 급기야 화염의 사운드는 터지고야 만다. 
 
잠비나이.  사진=The Tell-Tale Heart
 
세계를 무대로 활동해 온 밴드 잠비나이가 돌아왔다.
 
새 EP 음반 '발현(發顯/apparition·지난 11일 글로벌 유통사 '벨라유니언' 통해 글로벌 발매)'은 기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던, 이들의 사운드 합이, 더 날카롭게 부딪치고 뒤엉키며 타오르는 화학작용에 가깝다.
 
2019년 정규 3집 '온다(ONDA)'의 호평, 2020년 한국 대중음악상 2관왕과 2020년 영국 Songlines Award '올해의 아시아 아티스트' 수상. 그러나 팬데믹으로 계획됐던 80회 이상의 월드투어가 차질을 빚으면서 지난 3년간 세계 유수 온라인 공연(SXSW Online, Tiny Desk (Home) Concert)과 음반 준비로 벼려온 이들이다.
 
최근 화상앱으로 만난 멤버들, 이일우(프로듀싱·기타·피리·태평소·정주), 김보미(해금), 심은용(거문고), 최재혁(드럼), 유병구(베이스)는 "늘 서오던 무대가 자연스럽지 않은 상황이 되면서 '숙성의 시간'을 거쳤다. 이제는 멤버들 개성이 확실한 개별 톱니바퀴들(국악·양악 연주들)이 완벽히 조화와 합일을 이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보다 명확히 다져진 밴드로서 정체성, 내적 성장을 앨범 제목('발현')에 달았다.
 
"범접할 수 없는, 환영 같은 존재가 실제 눈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이미지를 연상했어요. 잠비나이가 조금 더 많은 대중들에게 다가가는 과정에 서 있다, 그런 작품으로 교감해보고 싶다는 뜻을 담아봤습니다."(이일우, 최재혁)
 
잠비나이 음반 '발현(發顯/apparition)'. 사진=The Tell-Tale Heart
 
팬데믹을 거치며 겪은 자신들의 고뇌와 이야기가 위로와 공감의 연주 언어가 됐다. 
 
첫 곡이자 타이틀 곡 '저기 저 차가운 밑바닥에서 다시'부터 대번에 '잠비나이 사운드'임을 직감할 수 있다. 거문고와 해금, 기타가 헤비하게 뒤섞이는 음악적 경계의 재창조, 다른 퓨전국악의 어법과는 다른, 거친 노이즈의 ‘신음악’이다.
 
"'저기 저 차가운 밑바닥에서 다시'는 3집 ‘온다’ 앨범부터 이어지는 연속적인 곡이 맞습니다. 거문고의 리듬적인 부분이 좀더 적극적으로 도드라지지요. 타이트하게 쪼개지는 리듬안에서 엑센트의 강약 느낌을 깔끔하게 표현하고 흔들림 없이 연주하는 것이 잠비나이 거문고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심은용)
 
잠비나이 사운드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특히 거문고다. 통상 거문고는 음의 높이를 조절하는 운지법으로, 잠비나이 내 다른 악기에 비해 소리의 볼륨이 작은 편이고 그 여운도 짧다. 그러나 적극적인 개방현 주법을 사용함으로써, 다른 악기들과 밸런싱을 유지하려 한다.
 
"개방현을 사용하면 전자악기와 드럼의 강한 사운드에도 뒤쳐지지 않죠. 음색들이 독특하고 때론 과감해져요. 괘를 긁는 주법, 트릴 같은 다향한 주법(발현 내 2번 수록곡 '지워진 곳에서')도 활용합니다."(심은용)
 
팬데믹 이전 한 해 평균 세계 80개 이상의 도시 투어를 돌던 잠비나이. 사진=The Tell-Tale Heart
 
국악, 멜로딕 데스 메탈과 포스트락은 황금 비율을 이뤄간다. 거문고를 필두로 해금, 드럼, 베이스, 기타가 어우러지며 속주를 이어가는 대목은 이들이 최근 공개한 영상('아르떼뮤지엄'과 협업)과 절묘한 이미지적 균형을 이룬다. 하나의 물줄기를 향해 쾌속의 질주를 불사하는 지류 폭포 같은 악기들.
 
"악기별 연주 비중이 다를지라도, 그 모든 악기들의 중요도는 동등하다는 생각입니다. 작은 부품이 없으면 서로 맞물려 돌아가지 않는 기계처럼요. 어떨 때는 드럼이 큰 바퀴가 되고, 어떨 때는 거문고가 작은 바퀴로 돌아가는 것이지만, 그게 결국 잠비나이라는 하나로 움직이는 셈이죠. 이번 음반부터는 멤버들의 연주 해석이 더 늘어난 점이 만족스러워요."(이일우)
 
팬데믹을 거치며 스스로 겪은 고뇌가 위로와 공감의 연주 언어가 됐다. '저기 저 차가운 밑바닥에서 다시'는 포기를 생각할 정도로 삶이 피폐해진 사람들에게 바치는 음악이다.
 
"자기가 믿는 길과 신념이 무너지는 순간들은 누구나에게 있잖아요. 자기 길을 천천히 닦아가는 저희들의 이야기예요."
 
4악장으로 구성되는 클래식의 교향곡에 비유하면, 두 번째 곡 '지워진 곳에서'는 1악장의 연결선상에 있는 2악장 아다지오다. 광활한 공간 위로 기타 현 울림이 처연한 가운데 해금이 울고, 선우정아는 바람결처럼 투명한 목소리를 보탠다.
 
"죽음을 테마로 만든 곡입니다. 세월호 같은 국가 재난으로 희생 당한 분들을 생각하며 썼던 곡이에요. 살아남은 사람들의 그을음, 타버려서 지쳐 있는 그 무게를 곡으로 써봤습니다."(이일우) "초반에는 기존 제 스타일의 박자 운용에 갇혀 있을 때도 많았지만, 이제는 곡의 감정선을 먼저 이해하고 해금으로 어떻게 해석할까 하는 습관이 된 것 같아요. 해금이란 악기는 선율로써, 잠비나이 만의 공간감을 형성해준다고 생각합니다."
 
3번 곡 '두 날개가 잿빛으로 변할 때까지'와 4번 곡 '이토록 거대한 어둠 속 작은 촛불'에선 가사 하나 없이 각각 9분과 7분, 장대한 연주만으로 세계를 만든다. "16비트로 늘 쪼개며 쉼 없는 연주만 하다가 마지막 곡에서는 발라드 느낌의 8비트를 연주해봤는데 주변에서 반응이 좋아 새로운 가능성을 봤어요."(유병구) "일우씨가 미디로 찍어온 드럼 파트는 일반적인 드러머의 플레이에서 벗어나는 부분들이 많아 재미있게 느껴집니다. 마지막 곡의 잔하게 가는 크레센도 파트를 몇번이나 할까 한참 고민했던 기억이 나요."(최재혁)
 
팬데믹 이전 한 해 평균 세계 80개 이상의 도시 투어를 돌던 잠비나이. 사진=The Tell-Tale Heart
 
'두 날개가 잿빛으로 변할 때까지'는 인생의 끓는점까지 가보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네가 노력이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닐 수도 있어"라는 공감의 언어다. '이토록 거대한 어둠 속 작은 촛불'은 거대한 팬데믹 안 작은 촛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하나하나 삶의 순간순간이 은은히 빛나는 촛불 같다고 생각했어요. 해금이 고음파트에서 춤추듯 진행하는 선율이 있는데, 그건 어둠 속 삶에서도 각자가 지닌 희열 같은 거라고 봐요. 화려하고 대단한 빛이 아닐지라도 작은 감동과 희망의 날들은 누구에게나 있잖아요."(이일우)
 
팬데믹 이후 무대가 끊기고 비대면 영상도 몇차례 찍어보면서 이들은 "음악 전달되는 방식이나 에너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한다. 세계적인 음악 방송 'Tiny Desk' 무대부터 최근 '아르떼 뮤지엄' 협업 영상까지 이어오며 미디어 아트를 결합하는 방법도 연구 중에 있다. 
 
"온라인 공연은 마치 벽을 보고 하는 공연 같은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에요. 실시간성도 떨어지죠. 다만 긍정적으로 보면, 이 기간 동안 '퀄리티 있는 영상 음악 콘텐츠는 뭘까' 고민을 많이 하게 된 것도 사실이에요."(최재혁, 유병구)
 
내년 잡힌 글로벌 투어 일정은 벌써부터 빼곡하다.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영국, 네덜란드, 벨기에 등 10개 도시를 도는 투어가 잡혀있다. 해외를 도는 일은 늘 순탄치만은 않은 일이다. 최근 멕시코 투어 도중 이일우는 비자와 악기를 도난당하는 사태를 겪기도 했다.
 
"미국을 경유해서 귀국하는 코스였는데, 저 때문에 밤까지 기다리고 악기 구입 비용까지 모아준 멤버들에게 감사하죠. 세계투어를 다니면서 물론 이런 힘든 추억들도 많은데, 이제는 그것도 축복이구나, 하는 생각들이 더 큽니다."
 
올해 5월31일에는 너바나와 유투가 거쳐갔던 네덜란드의 공연장 '베라'에 다시 설 것을 고대하고 있다.
 
"어쨌거나 지난 3년의 시간을 빼놓을 수 없는 앨범과 공연이에요. 코로나 기간을 거치면서 힘들었던 사람들, 그랬던 우리 자신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음악이 된 것 같아요. '베라'는 벌써 네 번째인데요. 유럽에서도 음악 역사적으로도 높게 평가되는 곳이거든요. 팬데믹 직전인 2019년 겨울 저희가 무대에 섰었고 '그 해의 라이브'에 선정돼 저희 이름이 공연장 벽에 적혔다는 소식을 나중에 들었어요. 내년에는 꼭 가서 실물로 보고 싶습니다."
 
네덜란드 공연장 '베라'에 이름이 걸린 잠비나이. 사진=The Tell-Tale Heart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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