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민승 법률전문기자] 병원은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공간인 만큼 죽음과도 가까운 공간입니다. 환자의 죽음을 현장에서 경험하는 의료진의 고충이 매우 클 텐데요. 치료 중 사망한 환자의 유가족은 1차로 의사의 의료과실을 의심할 수밖에 없어 민·형사상 책임을 묻는 절차로 나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의사의 과실로 환자가 사망하면 형사적으로는 형법상 업무상과실치사의 죄책을 지고 5년 이하의 금고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게 됩니다. 민사적으로는 사망한 환자와 그 직계존·비속 및 배우자에 대해 불법행위책임을 지게 됩니다. 문제는 법조문으로는 책임이 명확하지만, 실제 소송 과정에서는 과실의 입증이 어려워 매우 지난한 다툼이 이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10월23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장애인 접근권 국가배상 사건 관련 전원합의체 공개변론에서 발언하고 있다.(사진=뉴시스)
최근 대법원은 내과 외래에서 염증 수치(CRP) 검사 결과를 확인하지 않고 환자를 귀가시켜 사망에 이르게 한 의사의 업무상과실을 인정한 원심을 뒤집고 의사의 업무상과실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결했습니다.
내과 전문의인 피고인은 병원에 고열 등의 증상으로 내원한 환자인 피해자에 대해 일반혈액검사 및 일반화학검사, 간초음파검사 등을 실시하고, 일반혈액검사 결과 백혈구 수치가 정상치보다 높았음에도 염증수치인 C-반응성단백질(CRP) 수치를 확인하지 않은 채 대증적 처치만 하고 피해자를 귀가시켰습니다. 검찰은 피고인이 급성 감염증을 의심하여 피해자를 즉시 입원시키는 등 적절한 조치를 하지 않아, 피해자가 패혈증 쇼크 상태로 인한 다장기부전으로 사망에 이르게 했다면서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기소했습니다.
원심은 피해자에 대한 일반혈액검사와 일반화학검사 결과에 따르면 급성 감염증이 의심돼 원인 규명이 필요했다고 지적했습니다. 피고인에게는 피해자를 입원시켜 일반적인 급성 감염증의 치료법인 혈액 등의 배양검사를 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수액 요법과 경험적인 항생제 요법을 시행했어야 함에도 일반화학검사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피해자에게 소화기계 증상과 통증에 대한 대증적 처치만 하고 피해자를 귀가시킨 업무상과실이 있다고 보아 유죄로 판단한 겁니다. 1심 재판부는 피고인에게 업무상과실을 인정해 금고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습니다. 피고인이 불복했으나 2심 재판부는 항소를 기각했습니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 사건에서 의사의 과실을 판단하는 기준에 대해 다음과 같은 법리를 설시했는데요. △의사가 결과 발생을 예견할 수 있고 회피할 수 있었는데도 예견하거나 회피하지 못했는지 △같은 업무에 종사하는 평균적인 의사가 보통 갖추어야 할 통상의 주의의무가 기준 △사고 당시의 일반적인 의학 수준, 의료환경과 조건, 의료행위의 특수성 등을 고려 △의사가 완전무결하게 임상 진단을 할 수는 없어도 임상의학 분야에서 실천되고 있는 진단 수준의 주의의무를 다했는지 △전문 직업인으로서 요구되는 의료상 윤리, 의학지식과 경험에 기초해 신중히 환자를 진찰하고 정확히 진단함으로써 위험한 결과 발생을 예견하고 이를 회피하는 데에 필요한 최선의 주의의무를 다했는지 등을 고려해 판단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런 법리에 비춰볼 때 대법원은 피해자가 피고인으로부터 진료를 받았을 때 정상치보다 높은 백혈구 및 C-반응성단백질 수치에 비춰 피해자의 급성 감염증이 의심되었던 상황이었지만, 피고인이 피해자의 활력징후가 안정적이었고 다른 검사에서 이상소견이 확인되지 않아 피해자의 소화기계 증상과 통증 등의 원인을 급성 감염증 중 급성 장염으로 진단한 것이 ‘임상의학 분야에서 실천되고 있는 진단 수준의 범위’를 벗어났다고 보기 어렵다고 봤습니다.
피해자가 피고인으로부터 진료를 받았을 때나 C-반응성단백질 수치가 확인된 때 이미 패혈증 상태였거나 패혈증이 발생할 것임을 예견할 수 있는 상태였다고 볼만한 사정도 없으므로, 피고인이 피해자의 증상을 완화하기 위해 시행한 대증적 조치나 C-반응성단백질 수치 결과가 확인된 이후 피해자에 대한 입원 조치하지 않은 의료상 과실이 있다고 보기 어렵고, 피해자에게 패혈증, 패혈증 쇼크 등의 증상이 발현되어 하루 만에 사망에 이를 것을 예견할 수 없었다는 겁니다.
이번 판결은 형사적 책임에 관한 판결이므로 검사가 의사의 과실에 대한 증명 책임을 지게 됩니다. 이는 형사법의 원칙이고 검사는 강제수사도 가능하므로 병원이나 의사와 대등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무기가 있어 가능한 겁니다.
때문에 민사상 의료소송에서는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상대방의 불법행위책임을 주장하는 사람이 입증책임을 지기 때문입니다. 피해자인 환자의 유가족이 피해와 의사의 과실을 입증해야 하는 것인데요. 증거를 확보하기 곤란한 경우가 많습니다. 모든 의료기록을 병원이 갖고 있고 관리하는 현실에서 진료나 수술 과정 등에 대한 충실한 기록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소송은 개인의 입장에서는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드는 방법이 될 수 있어 개인에 비해 이런 제약이 적은 병원과 대등하게 다투기 힘든 측면도 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일정한 조건에 부합하는 경우 의료과실에 있어서는 입증책임을 전환하는 방법을 고려해 볼 수 있습니다. 병원이 진료기록을 충실히 작성한 경우에는 무과실입증을 쉽게 한다면, 의사의 진료행위를 위축시키지 않으면서도 진료 과정 등의 투명성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수술실 폐쇄회로TV(CCTV) 설치 제도가 도입될 정도로 의료에 대한 신뢰가 낮아진 상황을 극복할 방안이 될 수 있는 겁니다.
대법원은 공해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가해 기업이 유해 원인물질을 배출하고 그것이 피해자 측에 도달해 손해가 발생했다면, 가해자 측에서 그 무해성을 증명하지 못하는 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사회형평의 관념에 적합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가해자가 유해 원인물질을 배출한 사실, 그 유해의 정도가 사회생활상 통상의 수인 한도를 넘는다는 사실, 그것이 피해물건에 도달한 사실, 그 후 피해자에게 손해가 발생한 사실에 관한 증명 책임은 여전히 피해자가 부담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의료소송에도 일부 유사한 측면이 있는데요. 의료기술도 점점 발전하고 복잡해지는 상황에서 입증책임을 적절히 분배할 필요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으므로 제도가 개선돼야 할 것입니다.
김민승 법률전문기자 lawyerms@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