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안창현 기자] 국내에서 이주노동자 규모가 갈수록 늘면서 이들의 노동조건 개선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노동계는 130만명에 육박할 것으로 추산되는 이주노동자들이 제대로 된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특히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국제협약 비준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노동권 침해 우려는 가중되는 상황입니다.
23일 노동계에 따르면 정부는 출입국관리법 등 국내법과 충돌한다는 이유로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국제연합(UN)의 국제협약에 가입하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 정부가 운영하는 외국인 고용허가제는 사업장 변경에 지역 제한을 두고 있어 직업선택과 거주이전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에 임금체불 등 노동인권 침해를 당해도 관련법 제도 미비로 제대로 된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지난달 27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서울외신기자클럽에서 열린 ‘이주노동자로부터 직접 듣는다’ 기자간담회에서 필리핀 국적의 매리 크리스 씨가 계절노동자 인신매매 피해 사례를 증언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지난 1990년 UN이 채택한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의 권리보장에 관한 유엔협약’에는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은 노예상태나 예속상태에 놓이지 않는다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도 강제적 또는 의무적 노동을 하도록 요구받지 않는다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은 취업국의 영역 내에서 이전의 자유와 거주지 선택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은 법원에서 그 나라의 국민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은 노동조합 등 조직에 자유롭게 가입하고 노조에서 활동할 권리가 있다는 등의 기본적 이주노동자 권리보호 규정을 두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노동환경 개선이 없는 상황에서 정부가 이주노동자 확대 정책은 지속되고 있다는 겁니다. 앞서 고용노동부는 20일 제45차 외국인력정책위원회를 열고 ‘2025년도 고용허가제 외국인력(E-9) 운용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면서 비전문취업 비자인 E-9 외국인력 쿼터를 13만명으로 결정했습니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내년에도 경기하락이 지속될 것이 예상되는데, 정부가 발표한 내년도 이주노동자 도입규모가 현실적 추산일지 매우 우려된다”며 “더구나 고용허가제 이주노동자의 근로조건과 주거환경, 건강권 등의 노동환경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 계획은 전무한 상태”라고 말했습니다.
국내 노동조건 악영향 지적도
통계청의 ‘2024년 이민자 체류 실태 및 고용조사 결과’에 따르면 올해 5월 기준 15세 이상 국내 상주 외국인은 156만1000명으로 전년 대비 9.1%(13만명) 증가했습니다. 이 가운데 취업자 수는 전년에 비해 8만7000명 늘어난 101만명으로 조사됐습니다. 외국인 취업자가 100만명을 돌파한 건 올해가 처음입니다. 노동계는 미등록 노동자 수까지 합치면 국내 이주노동자 규모는 130만명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민주노총과 이주노동자평등연대가 지난 10월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전국이주노동자대회에서 강제노동철폐, 노동허가제 실시, 사업장 변경의 자유 보장, 이주노동자 노동권 보장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정부의 무분별한 이주노동자 확대 정책이 내국인 노동자의 고용과 노동조건에도 악영향을 미친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올해 서울시가 도입한 필리핀 가사노동자 사업이 대표적입니다.
한국노총 관계자는 “국내 가사서비스업은 저임금의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기피 업종이 된 지 오래됐지만, 서울시가 내국인 가사노동자의 임금과 노동조건 개선을 외면한 채 이들을 필리핀 가사노동자로 대처했다”며 “정부의 이런 일방적인 정책 추진이 외국인 노동자뿐 아니라 국내 가사노동자와 가사서비스업종 노동환경을 더 악화시키고 있는 상황”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안창현 기자 chah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