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단순히 음식에 관한 글일 거라고만 생각했던 예상은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보기 좋게 빗나갔다. 정동현 음식칼럼니스트의 새 에세이 '그릇을 비우고 나면 많은 것이 그리워졌다'. 음식은 곧 어둠 속 섬처럼 잠긴 내면을 치유했다가, 공연장 라이브에서 느끼는 카타르시스가 됐다. 돈가스 매장에서 화를 내던 아버지였다가, 소주병으로 칼국수를 미는 푸근한 엄마이기도 했다. 거기에는 음식으로 빚은 삶의 풍경이 있다. 생의 그리움이, 위로가, 기쁨이 있다.
글쓰는 셰프가 쓴 이 책은 어떤 음식이 맛이 있고 없다는 식의 단순 비평이 아니다. 삶의 마디마디에 자리했던 음식에 대한 이야기다. "인스턴트 라면 하나에 왜 눈물을 흘리고 가슴이 북받쳐 오르는지 그 작은 실마리를 찾고자" 썼다. 프루스트의 장편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같다. 마들렌을 홍차에 적시며 과거 기억으로 넘어가는 주인공처럼, 저자는 한식과 중식, 일식, 양식을 거쳐 기억의 시공을 넘나든다.
음식에 깃든 추억들이 한 가득이다. 이를 테면 양념통닭에서 어린 시절을 길어 올리는 그의 기억은 꼭 따스한 사진 같다. 부산 영도, 강릉행 기차에 오른 네 가족, 씨름 선수 배처럼 볼록한 닭, 점점이 박혀 있는 참깨, 뚝뚝 떨어지는 육즙…. 통닭에서 그는 박력있게 맥주를 들이키는 아버지를 보고, 숨도 안 쉬고 먹는 동생과 자신을 본다. 부모님께 철없이 조르면 먹을 것이 나왔고, 어깨를 기대 잠을 잤던 맘 편한 시절의 기억을 떠올린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의 기억은 육개장을 담던 하얀 일회용 용기 안에 있다. 국과 밥을 가득 퍼서 플라스틱 수저로 뻘건 것을 퍼먹던 그 때 그는 영안실을 지키는 것도 힘에 부치던 날이었다. 몸을 부수는 슬픔 속, 먼 길 온 객을 먹이기 위해 누군가가 끓이는 탕국의 존재를 돌아본다. 허망한 와중에 먹어야만 하는 인간의 원초적 생리, 비어있던 위장이 차오르면서 견뎌지는 슬픔. 육개장에서 그 옛날 겨울 키가 컸던 할아버지의 너른 어깨를 슬며시 본다.
학교 기숙사에서 아파하는 스무 살의 작가를 위로한 건 방을 함께 쓰던 형이 사다 준 비닐봉지에 담긴 죽 한 그릇이다. 꿈도 허락하지 않는 밤을 통과하던 이름 없는 아시아 노동자를 아들로 돌아오게 만드는 건, 체계도 레시피도 없지만 무조건적인 편애로 이룩한 엄마의 부침개 한 장이다.
살기 위해 배를 채우기 위한 음식이지만 우리가 먹는 건 음식 만은 아니다. 공기와 내음, 분위기, 사람들과의 수많은 순간과 장면이 담겨 있다. 그것은 때론 사무치고 서럽고 따뜻하고 그립고 아련한 맛이다. 그는 맛은 "온도, 질감, 볼륨의 공감각적 실체"라 한다.
책은 맛에 대한 단순 비평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직업으로, 프로로서' 일러주는 정보들도 많다. 배 껍데기가 검고 탄탄히 살이 꽉 찬 꽃게는 보통 잡히는 햇게가 아닌 몇 년을 산 묵은 게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사람들이 줄 서는 냉면집 육수 비결은 노계인 경우가 많고, 흔히 '불 맛'이라 말하는 훈제는 요즘 고기나 생선 외에 야채, 요구르트, 버터, 아이스크림까지 확대되는 추세라고 한다.
음식으로 생의 풍경을 빚은 그의 삶을 읽다 보면 '도전'에 대해서도 자문하게 된다. 대기업 유통회사를 그만 두고 그는 나이 서른 퇴직금을 털어 영국 요리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에는 집도 절도 밥도 없이 호주 멜버른으로 날아갔다. 늦깎이 셰프지만 음악과 영화, 문학으로 버무린 글쓰기에도 도전했다. 책 속 단문으로 쳐내린 글들은 리듬감도 아주 좋다. 마치 주방에서 같은 박자로 채를 썰고 있는 그를 연상시킨다.
"예순 살이 됐을 때 요리를 한 것을 후회할지,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할지 상상했다. 답은 명확했다."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