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동지훈 기자] 여러 정권을 거치는 동안 진전을 보이지 않았던 약 자판기 도입이 사실상 확정됐다. 대한약사회가 반드시 저지하겠다며 전면 투쟁을 예고한 가운데 일선 약국에선 약 자판기 도입에 대한 회의론이 나오고 있다.
22일 정부 당국과 대한약사회에 따르면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이하 과기부)는 전날 제22차 정보통신기술(ICT) 규제샌드박스 심의위원회를 열고 총 11건의 규제특례 과제를 승인했다.
이날 위원회에선 의약품 스마트 화상판매기, 이른바 약 자판기에 대한 실증특례 부여도 결정됐다. 실증특례는 현행법상 금지됐거나 안전성 검증이 필요한 신제품이나 서비스에 일정 기간 규제를 면제 또는 유예하는 제도다.
약 자판기는 저녁이나 심야, 휴일 등 약국 영업이 종료됐을 때 소비자와 약사 간 화상 상담을 통해 의약품을 제공하는 기계다. 약 자판기에서 판매할 수 있는 약은 병원 처방전 없이 약국에서 구매할 수 있는 일반의약품으로 제한된다.
과기부는 우선 3개월간 10개 지역에 약 자판기를 설치해 시범 운영한 뒤 보건복지부와 협의를 진행해 운영 장소 확대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약 자판기 도입 논의는 그동안 여러 정권을 거치는 동안 규제완화의 일환으로 논의됐던 문제다. 다만, 규제완화를 적용하려는 정부와 카운터파트인 대한약사회의 의견 차이가 좁혀지지 않으면서 결론이 나지 않았다.
정부가 약 자판기에 실증특례를 부여하자 대한약사회는 입장문을 통해 강하게 반발하며 전면 투쟁을 예고했다.
대한약사회는 입장문에서 "약 자판기 판매약 품목과 가격, 유통담합, 의약품 유통질서 훼손행위 등 위법성을 끝까지 추적·고발하고 기업의 영리화 시도를 반드시 저지해 약 자판기가 약사법에 오르는 것을 막아낼 것"이라며 "전국 16개 시도지부가 단결해 약사법에 위배되는 구체적인 실증특례 조건 부여를 차단하고 단 하나의 약국에도 약 자판기가 시범 설치되지 않도록 하는 등 어떠한 조건부 실증특례 사업에도 협조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가 약 자판기에 실증특례를 부여하면서 상용화 첫걸음을 내디뎠다. 카운터파트인 대한약사회가 강하게 반발하는 가운데 일선 약사들은 큰 수요가 없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일선 약국의 약사들은 약 자판기가 도입되더라도 수요가 크지 않을 것으로 전망한다. 동시에 약 자판기 운영을 위한 제반 비용 부담이 커 사용 확대까지 이어지지 않을 것이란 회의론도 내놓는다.
서울 A지역의 한 약사는 "소비자 입장에서 생각해도 약 자판기를 통한 의약품 구매까지 이어질지 의문"이라며 "유동인구가 많은 도심이든 약국이 많지 않은 외진 곳이든 비슷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약사는 또 "늦은 시간에 급하게 약이 필요한 상황이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얼마 되지 않는 경우를 위해 화상 상담까지 해야 한다면 지역마다 심야약국을 늘리는 게 낫다"면서 "약 자판기 사용자가 많다면 화상 상담을 위한 인력이 따로 필요해 이러나 저러나 부담인 것은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
의약품 제형마다 보관 온도나 조건이 달라 약 자판기 내부에서 안전한 재고 유지가 가능할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
같은 지역의 또 다른 약사는 "연고 형태의 약은 일정 온도에서 보관돼야 하는데 (약 자판기가) 무더운 날 야외에 있으면 변질될 위험도 있다"면서 "온도를 유지하려면 냉장 상태여야 하는데 전기요금만 해도 꽤 나올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현금보다 카드를 많이 쓰니 인터넷 배선도 준비하고 누군가는 (재고 의약품의) 유효기간도 확인해야 하는데 모두 비용이 드는 문제"라며 "어느 정도 지출이 생기는 문제인데 그만큼 이익이 보장되지 않으면 대부분 운영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동지훈 기자 jeehoo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