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섬 제주에서 바티칸까지-21)우리의 애도는 꼭 완성될 것이다

입력 : 2022-11-09 오후 3:57:32
꿈을 찾아 한국에 온지 2년, 21살 앳된 젊음이 스러졌다. 그곳은 나라가 아니었다. 완장 차고 거들먹거리는 사람은 넘쳐났지만 책임지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날 네가 그렇게 좋아해서 가고 싶어 했던 나라의 정부는 부재중이었다. 너희들의 비명과 절규를 못들은 척했다. 단풍 들어 아름다운 시월의 마지막 밤, 이국적 젊음의 향기에 마음껏 취해보려 찾은 이태원의 골목 경사길이 살아 밟은 마지막 길이 될 줄이야!
 
길을 가다보면 꽃길도 가지만 충격을 안고 가야만 하는 길이 있다. 억누를 길 없는 뼈아픈 슬픔을 안고 발길을 옮겨야만 했다. '딘 띠 뚜이엔'이 몇 년 후 살아서 자랑스럽게 졸업장을 받아들고 걸어들어 올 길이었다. 54년 전 전쟁 중 미라이 마을 학살현장에 다녀왔던 그 발걸음은 서울 한복판 이태원에서 참사로 희생된 베트남의 젊고 꿈 많은 인재의 희생의 억울한 죽음을 위로하러 빈딘 성의 오지 마을로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산골 소수민족의 무남독녀 외동딸이 한국으로 유학 간다고 했을 때 부모들은 얼마나 자랑스러웠겠는가?
 
우리 일행을 맞은 어머니는 동공이 풀려있었다. 얼이 빠진 사람의 표정이다. 아무리 눈물을 흘리고 통곡을 해보아도 사랑하는 외동딸은 살아 돌아오지 않으니 눈물은 마르고 가슴은 시커멓게 타들어갔을 것이다. 분명 그녀도 애통한 마음 없이, 사과하는 마음 없이 보내온 화환쯤은 길거리에 내팽개치고 짓이고도 분이 안 풀렸으리라!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할지 가슴만 먹먹했다. 코로나 지옥에서 해방된 자유를 만끽하러 축제에 나갔다가 영문도 모르게 인파에 밀려서 숨결을 놓았으니 얼마나 원통하랴! 304명 생때같은 아이들 그렇게 보낸 것이 엊그제 같은데 다시 우리 땅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으니 미안하다. 미안하다! 그런 나라의 국민인 게 미안하다!
 
그러나 이것만은 믿어다오! 네가 좋아하던 한국 국민은 반듯이 네가 왜 그날 그럴게 억울하게 죽어가야 했는지 진실을 밝혀내고 책임자를 문책할 것이다. 그들은 다시 촛불을 들었단다! 촛불이 너희들을 살려내지는 못하겠지만 내일 뜨는 해가 다시 절망의 아침이 되지는 않게 할 것이니 그 억울한 눈 고이 감으라! 너의 통곡과 절규가 새 역사의 지평이 될지니! 우리의 애도는 꼭 완성될 것이다. 이 땅에서 진실은 반드시 거짓의 멱살을 잡을 젓이다.
 
미안하다! 용서해다오! 너의 영정 앞에선 차마 무릎을 꿇지 못했지만 이렇게 무릎 꿇고 빈다.
 
용산구와 꾸이년 시는 자매결연을 맺어서 꾸이년 시에는 용산로가 있고 용산구 이태원에는 꾸이년로가 있다. 이곳에 용산구에서 파견 나온 윤성배 소장이 있다. 그의 안내로 빈딘 성과 가이 라이 성이 경계에 있는 고인의 고향을 찾았다. 조헌정 목사님과 꾸이년 세종학당 선생님 두 분 그리고 학생 한 분이 동행했다.
 
다음날 용산로가 끝나는 부분에 지어진 한옥 정자에서 출발하였다. 그 자리에는 윤성배 소장과 꾸이년 시 행정국장이 찾아와 꽃다발과 제비집으로 만든 건강음료를 선물 받았다. 윤성배 소장은 공무원들이 의례 그러듯이 형식적으로 일하는 게 아니라 진심을 다해서 한,베트남 우호 증진을 위해서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서 인상적이었다.
 
꾸이년은 맹호사령부와 십자성 1지원단 그리고 106 후송병원이 있던 도시이다. 당시 월남 파병은 십자성부대가 먼저 출발하고, 그 다음에 맹호부대가 출발했다. 처음 십자성부대 출발할 땐 다들 월남 가면 죽는 줄 알아 지원병이 없어 강제 차출 했는데 분위기가 살벌했다. 당시 파월 전투부대는 맹호, 백마, 청룡부대가 있고, 군수지원부대는 십자성부대, 의료 건설 지원단은 비둘기부대, 공군지원단은 은마부대, 탄약과 중장비 해상 수송엔 해군 백구부대가 맡았다.
 
맹호부대 파견 때는 박정희가 직접 나와서 환송식을 범국민적 차원에서 했다. 그날 부산항에 대한민국 별이란 별은 다 떴다. 부산항 환송식에서 장병에게 여고생들이 꽃다발 걸어주고, 군악대가 ‘월남 파병 노래’ 연주했다. ‘자유 조국 위하여 조국을 지키시다, 조국을 위하여 님들은 떠났으니, 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 용사들아. 가시는 길…….’ 1965년 10월 22일 멀리 한국에서 온 맹호부대가 꾸이년 항에 상륙할 때는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1964년 의료지원단과 태권도 교관 등 270여명을 사이공 남쪽 붕타우에 파견함으로써 베트남전에 군사적인 개입을 시작했다. 이후 65년에서 73년까지 약 30만 명의 전투부대를 ‘베트남 정부의 요청’이라는 미명 아래 베트남 전선에 투입했다.
 
베트남전에서 한국군들도 4960여명이 전사했고 10여만 명이 부상당했다. 그러나 한국군은 또한 적군인 베트남인을 4만 1450명이나 죽이는 전승(?)을 거두기도 했다. 아군 사망자수의 10배에 이르는 적군을 전사시킨 것이다. 그것도 공식적인 통계상으로만 그렇다.
 
꾸이년지역에 투입된 맹호부대는 맹호작전, 투코전투, 안케전투, 비호작전, 월계작전, 호랑이작전, 돌풍작전 등 수많은 전투에 참여했다. 백마부대는 닌호아에 사단사령부와 29연대가 주둔하고 투이호아에 28연대, 캄란에 30연대가 배치되어 백마작전, 도깨비작전, 승마작전, 박쥐작전, 동보작전, 등을 수행했고 백마와 맹호가 합동으로 오작교작전, 홍길동작전, 독수리작전 등을 치렀다.
 
채 몇 달도 안 된 다음 해 1월23부터 2월 26일까지 맹호부대 3개 중대는 한국군 최대의 학살을 자행했다. 이 지역 15개 마을에서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학살되었다. 맹호부대가 지나간 자리에는 사람이고 집이고 가축이고 모두 도륙되었다. ‘깨끗이 죽이고, 깨끗이 불태우고, 깨끗이 파괴한다.’는 구호 아래 수색소탕작전을 펼쳤다. 
 
‘깨끗이 죽이고, 불태우고, 파괴한다.’는 구호는 일제시대 때 일본이 한국의 의병들을 토벌하는 남한대토벌전에서 사용한 구호이다. 그토록 일본군에게 끔찍이 당하고, 치를 떨던 그 방법 그대로 자유와 독립을 갈망하는 인민들을 학살했다. 그 피눈물 나는 역사를 경험해놓고도 그렇게 그 잔악한 방법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단 말인가?
 
전선도 없고 적이 누군지도 모르는 베트남전에서 베트콩의 근거지를 수색, 파괴한다는 작전상의 명분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학살행위를 정당화시켜 주었다. 아니 그렇게 믿었다. 이곳에서 적의 개념은 모호했다. DMZ 너머에 있던 북베트남군은 확실한 적이었지만 북을 몰래 지원하는 남베트남 주민과 혹은 심증적으로 북을 지지하는 주민들까지 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타당하느냐의 난제에 봉착하게 된다. 전쟁은 어려운 문제를 차분하게 풀 시간적 여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거기에 보안법 같은 것도 없었다.
 
베트남전쟁에 대한 뼈아픈 반성의 못했기 때문에 역사는 반복된다. 이라크와 쿠웨이트, 아프가니스탄, 동티모르, 소말리아에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투병 주축의 부대가 파병되었다. 거기에 원전 수주를 이유로 아랍에미리트에 특전사 아크부대를 파견했다. 
 
여기서 전쟁은 오래 전에 끝났다. 우리에게도 베트남전은 잊고 싶은 전쟁이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지구상의 한편에서는 새로운 총성이 멈추지 않는다. 전쟁은 여비하고 더러운 면을 역사를 통하여 보여주건만 20세기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21세기의 또 다른 상처 하나를 낳고 있는 것이다. 상처받은 ‘오늘’을 치유하는 과정이 없이는 우리에게 미래가 없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양심에 칼을 대는 아픔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할지라도.
 
피의 대가는 미국으로부터 현금으로 지불됐다. 그 돈으로 독재자와 그 패거리들은 배를 불렸고 일부는 경부고속도로를 뚫었다. 그런데 아직 베트남에는 긴 국토를 종단하는 변변한 고속도로가 없다. 오늘도  먼지 펄펄 날리는 열악한 베트남 도로를 달려야 했다. 희생된 이들의 이름이 적혀있는 위령비 몇 군데 세운 것 말고는 치유의 움직임조차 없다. 베트남을 위해서 호찌민-하노이 고속도로라도 그 희생자들의 이름으로 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혜원상생의 첫 디딤돌이 될 것이라 믿는다.
 
베트남에 진심으로 머리 숙여 사죄하는 것이 앞으로 우리가 평화를 선도하는 나라로 나아가기 위한 첫걸음이다. 역사는 우리에게 의문부호 하나를 던져놓는다. 과연 그대들에게 진정한 반성은 있는가? 그대는 진정으로 반성하며 매일 조문하였는가?
 
강명구 평화마라토너와 조헌정 목사가 평화달리기 38일차인 지난 7일 한국 유학 도중 이태원 참사로 사망한 베트남 희생자의 유가족을 방문했다. (사진=조헌정 목사)
 
강명구 평화마라토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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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