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은 1948년 7월 20일 제헌 국회에서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 박사가 축하 꽃다발을 받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뉴스토마토 한동인 기자] 미군정 57호 피해자들이 '사유 재산'에 대한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한 건 예치금의 행방이 묘연하기 때문입니다. 예치금의 행방이 사라진 시기는 미군정 57호에 의해 사유 재산을 예치한 1946년부터 '대일 청구권 자금' 명목으로 처음이자 마지막 보상이 이뤄졌던 1977년 사이로 추정됩니다.
핵심 관전 포인트는 '예치금이 사라진 시기'입니다. 정치권과 학계 안팎에선 △미군정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넘어간 과도기 △이승만정부의 농지개혁 자금난 △박정희정부의 경제개발 자금 등입니다. 이중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이 심했던 이승만정부 때 농지개혁을 위한 자금으로 유용됐을 가능성이 거론됩니다.
①국고에 귀속됐나
1946년 미군정이 일본은행권을 7개 지정 은행에 예입하도록 한 명분은 '화폐 개혁'입니다. 광복 후 우리나라에서 일본은행권의 유통을 막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광복 직후 해외에서 귀국한 재외동포 약 300만명이 미군정 57호에 따라 7개 은행에 예입한 총액은 5억 3710만 4116원인데요. 1946년 당시 조선은행권 현존량이 69억 7200만원의 약 13%에 달하는 거액입니다.
명분은 '화폐 개혁'이었지만, 미군정은 우리 국민의 사유 재산을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미군정이 종식됐는데, 이때 미군정 57호 피해금액의 행방이 묘연합니다.
때문에 해당 자금이 미국으로 흘러 들어간 것 아니냐는 의심이 있는데요. 지난 1997년 미국 육군성 주한미군배상사무소는 미군정 57호 피해자가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진정서에 대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한반도에서의 모든 업무가 미군정장관 손에서 대한민국 정부 당국자의 손으로 이관됐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미군정은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해 축적된 재산을 몰수한 '귀속 재산'을 이승만정부에 이양합니다. 이는 1948년 9월 11일 이승만정부와 미합중국정부 간 체결된 '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초협정'에 명시돼 있습니다. 사유 재산과 귀속 재산의 성격이 다르긴 하지만 이때 귀속 재산의 내역을 보면 은행·증권·보험 등 사회서비스업의 모든 시설과 주식·채권·증서 등 무형의 재산도 포함됐습니다. 미군정 57호 피해 금액도 이승만정부로 넘어갔을 가능성이 높은 셈입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시행된 농지개혁 기간 당시 지주들에게 발행한 지가증권.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②자금난 시달린 '농지개혁'
이승만정부 시절 농지개혁 기초자금으로 유용됐을 가능성도 거론됩니다. 농지개혁법은 1949년 '농지개혁법'에 따라 실시됐는데, 농지를 농민에게 적절히 분배하고 농가경제의 자립과 농업생산력 증진을 통해 농민생활 향상과 국민경제 균형 발전을 위한 개혁 법안이었습니다.
북한이 1946년 3월 '무상 몰수-무상 분배'라는 방식의 토지 개혁을 단행한 것과 달리 남한 정부는 시장경제를 지킨 '유상 몰수-유상 분배' 방식을 택했습니다. 이 같은 방식의 농지개혁은 평가가 제각각이지만 대한민국 발전의 초석이 됐다는 평도 있습니다.
당시 지주들은 유상 몰수되는 토지 보상 가격을 연평균 생산량의 300%를 요구했지만, 농림부안에 따른 150%로 결정됐습니다. 보상 방식은 지가증권으로 지급하고, 정부가 벌이는 각종 사업에 우선 참여 혜택을 주기도 했습니다. 이때 농지개혁법에 의해 매수·분배된 토지는 전국 농지의 약 15%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해방 직후 남한의 공업 생산량은 급감했고, 미군정의 화폐 남발로 통화량이 크게 증가하며 인플레이션이 발생했습니다. 이승만정부 수립 첫 해 세입이 573억원이고, 이중 조세 수입은 겨우 10%에 불과했는데요. 결국 미국 원조와 은행 빚으로 충당해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또 1949년 9월 15일자 <서울신문>을 보면 이승만정부가 농지개혁 실시를 위한 예산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는 게 확인됩니다. '농림부, 농지개혁 실시를 위한 예산확보 방안을 강구 중'이라는 기사에는 "농지개혁 관련 예산을 농림부가 19억원을 요구했지만 기획처의 예비사정에 따라 삭감될 기세가 보이며, 농가실태조사 경비지출이 중단돼 직원들이 사실상 활동정지 상태에 빠졌다"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승만정부가 농지개혁 추진을 위해 '지가증권'을 통해 추후 보상하는 방식을 택했다고는 하지만 기초 자금 자체가 부족한 시기였다는 겁니다. 정부 예산의 100분의 1에 달하는 미군정 57호 피해 금액인 5억여원이 농지개혁을 위한 자금으로 유용됐을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옵니다. 특히 농지개혁은 미군정 시기부터 이어져 왔는데,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관련 기록들이 소실돼 예산으로 배정된 것 외의 기초 자금의 출처도 명확히 찾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③처음이자 마지막 보상…출처는 일본?
마지막 가능성은 박정희정부에서의 유용입니다. 미군정 57호 피해자들은 터무니없는 금액이기는 하지만 박정희정부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상을 받은 바 있습니다.
박정희정부는 1971년 5월 21일부터 1972년 3월 20일까지 10개월 동안 대일청구권 관련 신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1975년 7월 1일부터 1977년 6월 30일까지 대일청구권 자금 명목으로 보상에 나섰습니다.
이때 박정희정부는 일본 측으로부터 받은 3억달러 중 95%를 경제개발 비용으로 사용한 것으로 확인됩니다. 실제로 당시 재무부 재무정책국 자금시장과가 남긴 대일청구권 관련 자료에는 '대일민간청구권자금은 고속도로 건설, 포항제철 공장건설, 소양강댐건설 등 국책사업에 사용됐다'고 적혀있습니다.
그런데 박정희정부가 일본에 의한 피해도 아닌 미군정 57호 피해자들을 왜 대일청구권으로 보상해줬는 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입니다. 게다가 미군정 57호 피해자들이 보상 받은 금액은, 이들이 예치한 금액이 아니라 일본 정부의 배상액에서 왔습니다.
결국 미군정 57호 피해자들의 예치금 행방을 유추해 볼 수 있는 건 크게 3개의 시점인데요. 미군정 57호에 따른 피해자들의 예치금이 발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이승만정부 시기가 그 행방을 알 수 있는 열쇠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한동인 기자 bbhan@etomato.com